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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이봉창, 일본인이 되고 싶었던, 일본인이 되지 못했던 그의 이야기 본문

역사 이야기

독립운동가 이봉창, 일본인이 되고 싶었던, 일본인이 되지 못했던 그의 이야기

김창식 2016. 2. 24.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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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의 모던보이 일본인이 되기로 결심하다.

 

 1901년 8월 10일

 

 현재의 서울이자 그 당시 일제의 식민지 조선의 경성부에서 조선인인 그가 태어났다.

일제에서 기록한 그의 신문조서에 따르면 그의 어릴적은 그런대로 살만했다고는 하지만 서당과 소학교를 마친 후에는 그의 아버지가 방탕한 생활에 본처를 버리고 첩과 생활하게 되면서 가정형편이 매우 나빠졌다. 그래서 그는 졸업하자마자 용산구인 자신의 집 근처 일본인 제과점 화전위생당에 점원으로 취직을 하게 된다.

 

 방탕한 생활을 즐기던 아버지 탓이었을까. 그는 어떻게든 더 즐겁고 더 방탕하게 살기 원했다. 우선 돈을 벌어야하니 이 제과점을 거쳐서 약국에서 일을 하다가 용산역에서 열차를 관리하는 시용부로 또 전직을 하게 된다. 한 2년이 채 되지 않아 전직에 전직을 거듭 하는 것이 자신의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은 오래 하지 못하는 성격이었기 때문. 더구나 그는 돈을 벌면 버는대로 그 시절에 가장 좋은 양복을 빼입고, 여자에 사족을 쓰지 못하니 몽땅 다 써버리고 말았다. 이 모던보이는 사교성도 좋아서 주변에는 친구도 많았으니 그는 일본인 조선인 가릴 것 없이 만나며 거침없이 술을 마셔댔다.

 

  그는 시용부에서 역부로 역부에서 전철수, 연결수로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게되고, 비록 조선인이나 그의 삶은 그럭저럭 순탄해 보였다. 그런데 이때 부터 조선인으로서의 차별이 서서히 눈에 띄기 시작하였으니, 승진 1년 후부터 승급과 급여 및 상여금에서 한국인이 일본인에 비해 크게 뒤떨어 지는 차별대우를 받았던 것이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그는 조금 더 나은 자신만의 삶을 찾기 위해서는 더욱 더 일본인으로서 살아야 겠다고 결심한다. 그리하여 그는 지인들을 모아서 금정청년회를 조직하고 자신이 간사를 맡아 하수도 청소, 관제묘 보존 등 공공 봉사활동을 펴서 모두가 자신을 대일본제국의 신민으로 보아주기를 간절히 염원하였다.

 

 그러던 중 그에게 기회가 찾아 왔다. 철도국을 그만둔 일본인 지인이 조선인 식모를 구하여 데려가고 싶다는 의사를 타전해오자 이 못된 녀석이 자신의 조카딸을 설득하여 식모로 주선해서는 자신이 이 급료를 가불받아 여비로 충당하여 일본으로 가겠다는 생각을 짜내어 어머니를 설득한 것이다. 다행히 승낙을 받아서 이 일본인 지인과, 조카딸의 일행으로 슬쩍 끼어서 오사카로 건너가게 된다.

 

 오사카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일본인의 양자가 되었으며, 기노시타 쇼조라는 일본이름도 얻게 된다. 이제 자신도 조선인으로서 불편부당한 일을 겪지 않으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고 살아도 된다는 해방감을 잠시나마 맛보게 된 것이다.

 

 하지만 모던보이의 성품이 어디가랴. 여러 고생한 끝에 오사카의 가스회사에 취직했으나, 대우가 형편 없는데다가 돈은 번데로 써버리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영양실조로 각기병에 걸려서 친구집에서 5개월 요양도 하였으니, 이 자의 삶은 형편 없기 그지 없었다. 애써 복직을 하고 보니 경리 담당 직원이 일자리가 다 찼다 하여 일거리를 주지 않아 일을 그만두고 노동판을 구해 그럭 저럭 일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이 마저도 조선인이라 하여 차별대우를 받는 것이었다. 이 망할 놈의 조선인 딱지가 아직도 떼어지지 않아서 분통이 터지니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궁리한 끝에 어떤 지인이 일제의 천황을 보면 이 조선인의 딱지를 뗄수 있다는 말을 믿고 천황 즉위식에 참관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교토에서 하는 천황 즉위식 전에 조선에 있는 어머니께 돈 좀 보내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썼는데 이게 발목이 될 줄이야. 천황 즉위식을 보려고 들어 가던 중 순사가 몸수색을 하는데 한글로 쓴 편지가 나왔으니, 이 이유 만으로 경찰에 검속되어 9일간 구류신세에 처하게 된다.

 

 구류신세가 끝나고 나오게 되니 일자리에서는 차가운 시선이 난무하게 되고 이로 인해 막노동마저 그만두게 되었다. 비로소 그는 완벽한 일본인으로 살고자 한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가르칠때는 일본사람이나 조선사람이나 같은 뿌리에서 자라났다고 하면서, 왜 이렇게 차별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면 일본인들이 죽도록 밉다가도, 자신을,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자신의 조국 조선을 원망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가 할수있는 일이 무엇이 있으랴. 그는 일본인에 대한 옹졸하기 짝이 없는 복수 아닌 복수를 감행하기 시작한다. 사실 거의 망나니와 다를바 없는 삶을 시작하였는데, 오사카의 비누상점에 취직하였으나 수금한 매상금 100원을 갖고 도쿄로 달아나지를 않나, 해산물 도매점의 점원으로 취직하였을때는 동업자와의 경쟁에 싫증이 나 친구집에 머물거나 요시와라에서 여자를 사귀는 등 주인집에 돌아가지 않았다가 공장 기숙사의 주인으로부터 한심스럽다는 질책을 받자 확 열받아서는 회사를 그만두지를 않나, 그 뒤에는 가방점의 외판원으로 취직하였으나 판매금을 몽땅 써버리고는 그만두고 만 것이다. 그렇게 지내다보니 이제는 일본인으로 사는 것이 더 없이 싫어졌다. 친구가 일본인의 사위가 되라고 한 권유를 단칼에 거절하며 이제부터는 더이상 일본인으로 살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막상 그러고보니 일본에서는 더이상 발붙일 곳도 없어졌다. 이제는 생계가 걱정되었는지, 수소문 끝에 오사카에 있는 조선인 친구 박태산을 찾아가게 된다. 그런데 이 친구가 황금알 같은 정보를 주었는데, 상해 영국 전차회사가 조선인을 우대하며 그곳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그 일자리를 얻도록 주선해준다는 것이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그는 한달여 기간동안 상해에 갈돈을 긁어 모으기 시작한다.

 

 그는 이제 일본에는 털끝만큼의 정도 남아있지 않았다. 지독히 추운 겨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상해에 가기 위해 부지런히 돈을 모으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조선인으로서 구할 좋은 일자리가 있다는 것에 반가워 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무엇을 하는 곳이기에 이런 조선인들을 돕는 것인지 의문이 들기 시작하였다. 일본인으로서, 하루벌면 하루 즐겁게 사는 한량으로 살기 원했던 그, 기노시타 쇼조가 서서히 한국인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2. 기노시타 쇼조 김구를 만나다.

 

 1930년 12월 10일

 

 겨울 상해에 도착한 그는 막상 어디로 가야할지를 몰랐다. 더구나 그의 행색은 남루한 일본식 옷에다가 나막신을 질질 끌고 다녔으니, 어느 한사람 곱게 보는이가 없었다. 그래도 그의 사교술은 아직 죽지 않았으니, 상해에 조선사람들을 수소문하다가, 임시정부 통신처의 주소를 전해들은 것이다. 애써 벌어온 돈도 서서히 떨어져가고 그는 주저 할 것 없이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그 때는 한밤중이었으니, 임정요인들이 2층에 모여 비밀회의를 하고 있던 시간이었다. 난데없이 허름한 조선인이 나타나서 일본어가 섞인 한국말로 들여보내달라고 통사정을 하는 것이었다. 이러니 임정요인들이 밀정으로 착각하고 들여보내 주려 하지 않았다. 이때 그가 소리쳤다. 전차회사에 나를 소개시켜 주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일인가. 일본에서 조선사람이랍시고 무시당하여 겨우 이렇게 도망쳐왔는데, 여기서는 같은 조선사람끼리 이렇게 의심하고 무시하니 어찌 이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지 않고 온전하겠는가.

 

 이 모습을 온전히 2층에서 지켜보고 있던 김구는 그 말을 듣고는 이 조선인을 내치기에는 애석하고 들이기에는 의심할 여지가 있으니, 우선은 잠시 인근 여관에 머무르게 하였다. 주변의 임정 요인들은 일본의 밀정이 분명하다느니 궁시렁거리며 그 여관을 감시하며 그를 왜늙은이라 칭하였다. 며칠이 지나자 김구는 이 청년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은밀히 여관을 찾아간다.

 

 김구가 찾아오자마자 그는 아주 반가워 하며 영국의 전차회사에 나를 소개해줄수는 없느냐, 그곳은 돈을 많이 주느냐 등 김구가 생각하기에 조금 실망스러운 이야기만 늘어놓는 것이었다. 김구는 기꺼이 영국 전차회사에 그를 소개해주지만, 애석하게도 그 회사에서는 영어나 중국어를 할줄 알아야만 받아준다는 것이다. 일본어나 유창하게 할줄알았지 영어나 중국어는 문외한인 그는 결국 그 곳의 취직도 단념하였다. 상해에 온것을 후회하는 것도 시간 낭비였다. 곧 바로 일자리를 수소문하여 철공소에 취직하였으나, 입에 풀칠도 하기 어려울 정도로 적은 임금이었다. 결근하는 날은 잦아지고, 이제 돈도 없고, 갈곳 한곳 뿐이었다. 그는 다시 임정의 문을 두드린다.

 

 경계하는 요인들 속에서 그나마 반갑게 맞아주는 인물은 김구였다. 김구는 남루하고 며칠 먹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그를 근처 중국요리집으로 데리고 간다. 허겁지겁 음식을 먹고, 술잔을 거침없이 비우는 그에게 김구는 일본에서의 생활이 어땠는지 어떻게 하여 이렇게 상해까지 건너오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이 모든게 경술년에 나라를 빼앗긴 것이 그 원인이라, 어디를 가나 이 모양 이 꼴로 살게 될 것이라면 사는게 어떻게 사는 것이라 할수있겠느냐는 그의 말에 김구의 마음이 서서히 그에게 끌리고 있었다.

 

 하지만 임정 요인들은 아직 그를 의심하여 김구에게 그를 지나치게 가까이 하지 말라고 권유하기 일쑤였다. 고심을 하던 김구는 그를 어떻게 시험할까 궁리하다가 3~4명의 청년을 데리고 그를 찾아갔다. 그의 분통이 터지는 일본에서의 삶을 들으며 김구는 나라 없는 설움이 그런것이며, 이 임시정부가 나라를 다시 되찾기 위해 이렇게 노력하고 있으니, 언젠가 좋은 날이 오지 않겠느냐며 위로하였다. 그리고 방문 후 연회를 마련하였는데 술이 거나하게 취한 그는 김구와 임정 요인들에게 그 일본왕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은 없는것이냐 하고 물었다. 사람들이 그를 비웃으며 그렇게 쉬운 일이라면 왜 처단하지 못하느냐고 하자, 그가 말하길, 작년에 동경에 있을 때 하루는 일왕이 하야마에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구경하러 가서 한참 바라보고 서있었다. 그런데 왕이 내 앞을 지나갔다. 나는 이 때 가슴이 일렁이고 온몸의 피가 솟구쳐올라 내게 무기만 있다면 큰일을 한번 해볼 텐데 하고 생각하던 중에 일왕이 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버려 좋은 기회를 놓쳤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김구는 이 서른살의 청년이 어쩌면 무언가를 해줄 수 있을지 모른다는 한줄기 희망을 발견하였다. 이후 김구는 자주 그를 찾아갔다. 부지런히 그에게 나라없는 설움을 자각하고 젊은이 들이 나서서 무언가를 꼭 해주어야 다시 해방이 되고 우리말쓰며 우리직장에서 불편부당한 대우 없이 잘 지낼수 있다하였다. 이야기가 오가던 중 예전의 취중담이야기가 나왔고, 그는 그 말이 단지 취중이라 한 이야기가 아님을 밝혔다. 기어이 폭탄을 준다면 일본에 가서 거사하겠다고 하였다. 김구는 그에 깊은 감명을 받고 후원자가 되어 꼭 이 거사를 실행시키겠다 하였다.

 

 그는 인생을 즐겁게 살고 싶었다. 깔끔한 옷에, 여자와 사랑아닌 사랑을 나누고 친구들과 술로 밤을 새우며 쉼없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제 그런 즐거운 삶은 더 이상 찾아올 것 같지 않았다.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찾아가려 했는데, 그것을 누군가 앗아가버린 것만 같았다. 이제 그는 자신의 삶을 앗아간 그들에게 칼을 겨누기 시작했다. 그는 눈을 감고 생각했다. 누구도 할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 일, 감히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던 일, 그것을 담담히 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시대의 진정한 모던보이가 할 수 있는 가장 멋있는 최후의 일이자, 나의 조국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가장 뜻 깊은 최초의 일이 아니겠는가 하고 말이다.

 

 

3. 불행부중 - 불행히도 명중시키지 못하다.

 

 1931년 2월

 

 그는 다시 일본인 기노시타 쇼조가 되었다. 아니 이번에는 일본인의 가면을 썼다. 그는 상해 홍구방면에서 거주하며 자신이 임정의 주요인인 김구를 만난다는 것을 숨기기 위하여 우선은 일본인 인쇄공장에 취직을 하였다. 누구도 그가 일왕을 살해할 것이라는 의심을 품게 하지 못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그의 특기이다. 술은 한량이 없고, 여색은 제한이 없으며, 일본 가곡은 능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취직한지 두달 뒤에는 일본인 악기점의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신임을 얻기 시작하였으니, 홍구에 거주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아 그의 친구가 된 일본인들이 남녀구분하지 않고 상당하였다. 그래도 이곳이 외국인지라 완벽한 일본인으로 모두가 오해하였으니, 그중에는 일본 경찰도 속해있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틈틈이 김구를 만났으며, 일왕인 히로히토를 폭사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드디어 김구가 수류탄을 구해왔다. 12월 13일 그는 김구를 만나 러시아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지하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며, 김구는 그에게 중국 돈 300불을 건넸다. 저녁을 다 먹은 그들은 사진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가 김구를 위로하며 이르길 내 나이가 31세이니 앞으로 다시 31년을 더 산다 해도 과거 반생에서 맛본 방랑생활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에 무슨 취미가 있겠는가?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인생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다. 이제 생각을 해보니 제가 그런 까닭에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하여 상해로 와 임시정부를 찾아온 것 같다. 라고 하였다.

 

 사진기를 마주한 그는 조선의 모던보이 답게 더블코트를 깔끔히 입고 활짝 웃어보였다. 죽음을 앞에 둔 자에게, 그 죽음을 스스로 선택한 자에게 나올 수 없는 그런 웃음. 하지만 김구의 기색이 좋지 않았는데 그가 위로하기를 영원한 쾌락을 향유코자 떠나는 길이니 기쁜얼굴로 사진을 찍자며 애써 웃게하는 것이었다. 그리고서 그는 '나는 적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괴수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라는 선서를 하고 한인애국단 제 1호로 가입하기에 이른다.

그가 상해를 떠나 일본으로 간다고 하자, 수많은 일본인 친구들이 배웅을 나왔다. 그의 옷깃을 쥐고 눈물지은 여자들도 적지 않았으며, 가는 길이 평안하기를 축하하는 친구들 중에는 경찰들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 가짜일본인 기노시타 쇼조가 감히 일본 천황을 죽이려고 두개의 수류탄을 품고간다는 것을 아는 자는 오직 그와 김구 뿐이었다.

 

 일본에 도착한 그는 일본의 심장인 동경으로 향했다. 일왕이 도쿄 교외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갈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그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삼엄한 일본 경찰 경비를 완벽하게 뚫고 지나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폭탄을 던질 장소를 찾다가 경찰의 경비 정도가 적은 곳을 찾아 택시를 타고 가던 중 마침 지나가는 천황의 행렬을 보고 그는 망설임 없이 수류탄을 던진다.

 

 그러나

 

 그 수류탄은 위력이 약했던 수류탄인지라, 말이 다치고 마차가 조금 손상되었을 뿐, 일왕에게 전혀 지장을 주지 못한 채로 끝나고만 것이다. 후일 김구는 이 거사를 확인하고는 크게 아쉬워 하며 자금의 제한으로 좋지 못한 폭탄을 주어 일왕을 제거하지 못한 것이라며 자신을 책망하였다. 여하튼 그는 자신이 폭탄을 던진 것임을 시인하였으며,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각국의 언론은 뜨거웠다. 일본의 신문은 그의 의거를 호외로 보도하며 그들의 왕이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하였으며, 중국의 국민당 신문은 한인이봉창저격일황불행부중(韓人李奉昌狙擊日皇不幸不中)이라하여 한국인 이봉창이 일황을 향해 저격하였으나 불행히도 명중하지 못하였다며 대서특필한 것이다.

 

 이제 그에게는 죽음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일왕을 죽이지 못하여, 자신을 벼랑끝으로 내몰아간 일본에게 시원하게 한방 날려주지 못해서 원통할 따름이었다. 그는 이후로 무려 아홉번의 심문을 받게 되고, 9월 30일 오전 9시에 무려 350명의 경찰들이 겹겹이 둘러싼 가운데 그에게 사형 선고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4. 지극히 인간적인 그러나 더없이 숭고한 의사 이봉창

 

 1932년 10월 10일

 

 그는 형장 속 차가운 이슬로 사라졌다.

 

 그의 의거의 최후는 어이없다고 할 수도 있었으나, 그의 행동으로 인하여 많은 것이 변화하였다. 그 당시 다 쓰러져가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다시 기사회생하게 되고, 그 당시 반한감정이 컸던 중국이 한국을 대단하다 평하며 친한감정으로 돌아서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이봉창의 의거는 의열투쟁의 시발점이 되어 이후 뒤를 이은 윤봉길은 더욱 치밀하게 준비 드디어 거사에 성공하게 되었다. 당시 김구는 그가 처형되던 날 전체 단원에게 단식을 명하여 그의 죽음을 추모하게 하였다. 광복 이후인 46년 김구는 이봉창의 유해를 돌려 받아 효창공원에 윤봉길, 백정기와 함께 안장하였으며, 62년에는 정부에서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여 그의 업적을 높이 기리었다. 또한 92년 10월에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이 되었으며, 95년에는 그의 동상이 효창공원에 세워졌다.

 

 그는 본디 영웅이 아닌 영웅이 된 인간이었다. 그는 자신답게 즐겁게 살고 싶어서 일본인으로 살고 싶어했고, 수많은 역경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이 되지 못하였기에, 한국인으로서 일본에게 총구를 겨누게 된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친구와 술을 좋아하고 여자를 가까이한 그 시절 자신은 알고 있었을까. 자신이 서른살의 나이에 일본의 심장부에서 그것도 살아있는 신이라며 신성시 되는 일왕에게 감히 폭탄을 던질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의 의거로 인해 10억 중국인들이 한국을 다시보게 되고, 그의 행동에 감명을 받은 한국인들이 독립운동을 더욱 활발하게 할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난 지 무려 80년이 된 지금까지도 일본인이 되고 싶어한 조선인 기노시타 쇼조가 아닌 더없이 숭고한 그러나 지극히 인간적인 의사 이봉창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그가 살아온 생애가 비록 비루하고 한심하다고 보일지라도 그의 거사의 숭고함에 있어서는 조금의 누조차 될 수 없을 것이다. 세상 누구도 해본적 없었던, 생각 조차도 할 수 없었던, 적국의 심장에 비수를 꽃으려던,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 큰 획을 긋게 될 일을 영원한 쾌락이라 부르며 기꺼이 그리고 자랑스럽게 하려 했기 때문이다.

 


<한인 애국단 제1호 이봉창 의사>



위의 글은 대부분의 사실을 바탕으로 일부를 각색하여 서술한 것입니다. 

참고 바랍니다.



출처 :

http://ko.wikipedia.org/wiki/%EC%9D%B4%EB%B4%89%EC%B0%BD

(위키백과 - 이봉창)

http://www.leebongchang.org

(이봉창 의사 기념 사업회)

백범일지

(김구 지음, 도진순 엮음, 돌베개, 2005)

도왜실기

(김구 지음, 엄항섭 엮음, 범우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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