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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과 강유의 북벌은 다르다. 본문

역사 이야기

제갈량과 강유의 북벌은 다르다.

김창식 2012. 11. 14. 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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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공명 사후 강유가 시도한 북벌전의 문제점>

- 제갈공명 북벌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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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序)

* 본(本)

A. 형주상실에서 파생되는 촉의 진로

A-a. 제갈량의 북벌 - 이공위수의 계책

A-b. 강유의 북벌 - 단순한 침략전쟁

* 결(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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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序)

촉의 2대에 걸쳐 시행된 북벌은 현대의 논자들에게 자주 논해지는 사항이다. 그러나 제갈량의 북벌이 다소 긍정적인 부분으로 해석되는 반면 강유의 북벌은 부정적인 부분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이는 제갈량의 북벌과 강유의 북벌이 북쪽으로 나아가는것은 같았으나, 그 취지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삼국지 통치학에선 <제갈공은 천하대세의 흐름을융중에서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위나라는 하루아침에 무너뜨릴 수도 없고 촉한의 한 구석에 있는 후주의 힘으로는 천하를 광복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가 군사를 일으켜 북벌에 나선 것은 공격을 통해 수비를 하려고 했던 것이다.>이라 언급하여 제갈량의 북벌이 이공위수의 계책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즉 제갈량의 북벌은 형주를 상실한 부분에서촉이 나아갈 수 있는방책은 융중대책의 수정판, 이공위수의 계책이었지만 강유의 북벌은 정복의 취지가 더욱 강하였다는 점에서 그 차이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손자병법에서도 <그러므로 전쟁을 함에 있어서는, 서툴더라도 재빨리 결말을 지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는장기전으로 갈시 국력의 손실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시행의 대상은 형주를 상실하여 삼국중 가장 국력이 약한 촉이었으니 상황은 더욱 심각해질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제갈량의 북벌은 약 2년을 주기로 이루어졌는데(228,229,231,234), 이것은 제갈량이 북벌을나가 위의 침공을 미연에 방지함과 동시에 국내의 혼란스런 사정을 통제하려는 숨겨진 의도였다. 실지로 제갈량은 병사의 손실을 최소한으로 하여 싸우는 방식을 택하였고, 이러한 부분으로 미루어 보아 제갈량의 북벌은 이공위수의 계책이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에 반하여 강유의 북벌은 촉의 실정을 고려하지 않은 북벌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 항상 대규모로 출병하려고 하여 비의는 늘 그것을 제지하며, 그에게 준 병력은 만 명에불과했다. (중략) 강유는 단곡(段谷)에서 위나라 대장군 등애에게 격파되어 병사들이 뿔뿔이흩어졌으며, 매우 많은 수가 사망했다. 병사들은 이로 인해 모두 강유를 원망했고, 농서 서쪽 지역에서도 소동이 일어나 안정되지 못했다. 》- 정사 촉지 강유전 中

강유가 항시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출병하려하여 이를 저지하려 했다는 비위의 행동과 비위 사후 대규모병력을 인솔하여 나왔으나 크게 패하여 대병을 잃은 점에서 병력의 피해를최소화하고 공격으로써 수비를 대신하려는 취지를 살린 제갈량의 북벌과 강유의 북벌의 차이를 확연히 알 수 있다. 촉의 당시 실정은 형주가 오나라에게 상실되어 그 세력이 익주에국한되어있는 상황이었다. 또한 방어하기는 좋으나 나가기는 어려운 산지를 끼고있었으며인구수는 다른 이국(二國)에 비해 확실히 떨어졌다. 호구수에서 병력의 차출정도를 유추할수 있으니, 촉의 병력이 그만큼 위에 비해 상대적으로 모자랐음을 쉽게 알 수 있는것이다.본문에서는 강유의 북벌이 이런 열약한 촉의 실정을 고려하지 않은 비효율적인 정책이었으며 이로써 촉이 멸망할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 본(本)

A. 형주상실에서 파생되는 촉의 진로

유(劉)씨의 후한은 기원전부터 400년의 역사를 지내왔다. 후한말 당고의 난, 황건의난 등으로 인해 조정의 힘이 급격히 약화되고 난세(亂世)가 도래하였다. 이때에 대륙각지의군웅들은 스스로의 정통성을 주장하여 대권을 잡기 위해 애썼고, 황건의 난 이후 40여년 후크고 작은 세력들이 서로 뭉치고 흡수되어 비로소 삼국(위, 촉, 오)의 정립이 이루어졌다.이중 스스로 후한(後漢)정권의 일족임을 주장하여 한조재흥(漢趙再興)을 목적으로 거병한 세력이 있었으니, 그것이 선주 유비의 촉한정권이다. 초기 촉한의 구심점인 선주 유비는 대륙의 전토에서 전전긍긍한 끝에 마침내 입촉하여 한중왕에 오르고, 이후 촉제(蜀帝)에 올랐다.이때 유비는 형주와 익주, 두 주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러한 정세를 취하게 하는데에는 와룡 제갈량의 공적이 지대했다고 말할 수 있다. 제갈량은 출사하기 이전 융중대책에서 유비에게 삼로북벌(三路北伐)의 계획을 진언하였고, 유비가 입촉하여 한중왕에 오름과 동시에이가 실행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다. 그러나 형주의 장(長)이었던 관우가 형주의 군만으로 조위(曺魏)를 정벌키위해 북진한 사이 동오의 손권은 여몽을 파견하여 형주를 빼앗고 관우를 처단하기에 이른다. 융중대책에 근거한 촉한의 목표는 사실상 이때부터 천하재패에서익주(촉한)의 방비를 목적으로 변한다. 그러나 형주를 잃은 손실은 막대하여 익주의 군만으로는 익주 전역을 지키기에 모자람이 있게된다. 이에 유비는 겉으로는 관우의 복수를 위해,안으로는 옥토(鈺土) 형주를 되찾기위해 출병하지만 패하여 죽어 후주 유선이 즉위하게 된다. 유비가 죽음으로써 제갈량은 명실상부한 촉한의 구심점으로써 다시끔 자리매김하고, 형주를 잃은 손실을 만회키위해 남중을 정벌하여 약간의 힘을 비축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 있었다. 일찍이 제갈량은 융중대책에서 진언했던 삼로(三路)군은농서로 익주의 군이 진출하고 예주로 형주의 군이 진출함과 동시에 우방인 오국의 도움을얻어 서주로 치고 올라가게 하는것이었다. 그러나 형주를 손실한시점에서 이미 이 융중대책은 실현될 수 없었으며, 거꾸로 촉으로써는 천하통일보다는 국토를 방어하기위한 목적의 전쟁을 벌여야했다. 이러한 와중에 진행된것이 제갈량의 소위 육출기산이다. 그럼 제갈량사후그 뒤를 이어 진행된 강유의 북벌은 제갈량의 북벌과 어떤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지 이야기해보자.

A-a. 제갈량의 북벌 - 이공위수(공격은 최선의 수비)의 계책

동서고금과 만사(萬事)를 막론하고 어떤 일을 시행함에 있어서 합리적임을 논하는것은 그일이 목적을 달성하였느냐 못하였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전쟁의 목적은 기본적으로 승리하는것이라 하고있다. 이는 병서의 기초가 된 손자병법에서도 이야기하고있는 사실이고, 그목적이 공격에 있다면 충분히 옳은이야기이다. 그러나 그 목적이 방어에 있어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즉, 이공위수의 계책으로써 시행한 전쟁은 그 목적역시 방어에 있는것이기 때문에, 제갈량의 육출기산은 방어의 본 목적을 달성한것으로 호평받을 수 있다.

《 제갈공은 천하대세의 흐름을 융중에서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위나라는 하루아침에 무너뜨릴 수도 없고 촉한의 한 구석에 있는 후주의 힘으로는 천하를 광복할 수 없다는 것도알고 있었다. 그가 군사를 일으켜 북벌에 나선 것은 공격을 통해 수비를 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공위수는 다른 사람에게 보일 수 없었기 때문에 위연의 계책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로 인해 그로부터 원한을 사게 된것이다. 》- 사상으로 읽는 삼국지 中 -

《 천하삼분지계의 요점은 형주와 익주를 발판으로 삼아 조조, 손권과 솥발의 형세로 천하를 나눈 다음, 기회를 엿보아 북방의 조조를 치는 것을 도모해보겠다는 것이다. 그 중심에형주가 있었다. 그리고 비단 제갈량이 아니더라도 삼국지를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면형주의 전략적 중요성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중략) 그런 형주를 촉이 잃게 되는 순간 제갈량의 천하통일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나관중도 몰랐던 삼국지이야기 中 -

왕부지는 독통감론에서 현실성에 의존한 융중대책의 수정본으로써 육출기산이 이공위수의계책임을 역설하고있다. 융중에서 제갈량이 유비에게 제시한 진천으로 진격하는 북벌은 형주의 관우와 손권의 오나라가 동시에 움직이는것을 전제로 한 정복론이었다. 그러나 형주를상실하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새로이 형주를 취한 손오정권에서 소극적인 태도(수성책)를보임으로 인하여 북진의 루트는 당초 이야기 한 삼로(三路)에서 일로(一路)로 줄어들어 보리고, 이 한 길로써 나아가는것 역시 병력의 부족으로 취하는것을 목적으로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더구나 촉의 전역을 방어하기에도 모자란 촉의 병력부족으로 인하여 촉은 이공위수의계책을 배경으로 한 육출기산을 시행할 수 밖에 없게되는데, 이를 시행하기 위한 포석(미리준비해 두는 돌)이 바로 촉오(蜀吳)동맹이다. 제갈량은 형주를 상실함으로써 사이가 틀어진오나라를 동지로 끌어들임으로써 동쪽을 수비하는 병력을 북진에 집중시킬 수 있게되었고,이미 남중까지 평정하여 군력을 더욱 증강시켰기 때문에(i) 10만여 정도밖에 안되는 촉군을최소의 수비병력을 놔둔 채 움직일 수 있게된 것이다.

(i) <제갈량은 군대를 인솔하여 남쪽으로 정벌을 나서 이 해가을, 전부 평정시켰다. 군수물자가 새로 평정한 여러 군에서 나왔으므로 국가는 풍요해졌다. 그래서 군대를 정비하고 무예를 익혀 시기를 기다렸다가 큰 군사행동을 일으켰다.>- 정사 촉지 제갈량전 中 -

유씨의 촉한정권은 명분을 중시한 세력이었다. 때문에 선주 유비가 내걸었던 간판 역시한조재흥(한나라를 다시 부흥시킨다.)이었으며 위문제(조비)가 선양을 받아 황제가 되었을때이를 인정하지 않았던것 역시 촉한이 정통성을 지닌 세력이라는것을 크게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촉과 위는 애초에 서로 상반되는 기질을 가지고 있었으며, 선주 사후 그의 유지를 이어받은 제갈량은 스스로 촉의 구심점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가뜩이나 국력이 약한 촉이었기 때문에 장기적인 안목으로 촉의 국력을 상승시켜야 했다는것이 육출기산을 비판하는정론(正論)이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모순점이 있다.

국력은 끓는 물과 같이 적은쪽이 먼저 끓어오는것이 아니다. 중국중세사에서 6:1이라 나타낸 국력의 비가 이를 대변해 주는데, 국력을 측정하는것의 범주는 당시의 군사력과 외교능력, 상업치와 인구등 국가에 관련된 모든 사항을 종합하는것이다. 이에 빠질 수 없는것이`장래성`이다. 제갈량이 육출기산하지 않고 시일을 끌며 촉의 국력을 신장시킨다고 친다면,위나라 역시 마찬가지로 국력의 상승이 있을것이다. 촉이 발전하는데 본디 그 국력이 촉의여섯배였던 위가 국력이 항상 그 일정선을 지키고있을것이라는 주장 자체가 모순적인 발언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이는 인구의 수로도 대변이 가능하다. 진서에서는 촉이 멸망할 당시의 인구가 94만, 위가 440만이라 이야기 하고 있다. 병력 또한 8만 대 50만으로 이야기 하고 있는데, 이러한 인구비율로 말미암아 봤을때 출산률을 따지지 않을 수 없다.

《 선진국의 인구 증가의 원인 : 생활 환경의 개선, 의학의 발달로 사망률 감소 / 개발도상국의 인구 증가의 원인 : 의료 기술 보급, 생활 수준 향상으로 인한 사망률 감소 》- 중3사회자습서 中 -

중학교 3학년과정의 사회자습서에서는 산업혁명 이후 선진국과 최근 개발도상국의 폭발적인 인구증가의 원인으로써 의학의 발달과 생활수준향상을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당시 위나라는 서쪽으로 중앙아시아까지 진출할 수 있었으며 동쪽으로는 배를 타고 나가 해상무역또한 이룰 수 있었다. 반면 촉의 경우는 남중을 정벌함으로써 베트남지역과의 교역이가능하게 되었지만 해상무역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이러한 상업발전의 차이는 인구증가에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더욱이 촉한정권이 그 기반을 험난한 파촉 익주지방에 두고있었기때문에 질병과 사고의 위험 또한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위나라의 지세는 산지에 비해 평지가 많고, 황하강을 비롯한 큰 강줄기의 영향을 받아 더욱 편안하게 살 수 있었으니 인구의 증가율에서도 위가 촉을 압도하고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실지로 제갈량 역시 촉과위의 국력차가 더욱 벌어지리라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위를 괴롭힐 필요가 있었다.

《 유비는 당시 천하대세는 아직 유동적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공명은 오히려 위와 오의 세력은 이미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대세를 쉽게 변화시킬 수 없으리라고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촉이라는 일개 변방의 나라로 오래도록 안주하는 것은 촉의 국시가 용납하지 않았다. 여기에 공명의 비할 바 없는 고뇌가 있었던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 중국중세사 中 -

유비가 본 유동적인 시각과 제갈량이 본 고정적인 시각은 확실히 차이가 있다. 분명 당시의 시대상황은 제갈량이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고정적인 세력으로 자리잡은 위와 오의경우는 아무런 제재없이 그저 관망하기만 한다면 서로 더욱 커지기만 할 뿐이었다. 만약 삼국이 다툼없이 그 세력이 커져간다면, 위의 팽창률을 변방의 촉한으로써는 따라갈 수 없게된다. 그렇게 된다면 촉은 손한번 쓰지 못하고 대국 위의 쉴세없는 침입을 받게될것이 자명한 이치였다. 이에 제갈량은 군사를 이끌고 최소의 피해로 위를 괴롭히는 육출기산으로써이공위수의 계책을 시행하여 촉을 방비하고 위를 견제하는 행위를 하고자 하였다. 이 와중에 육출기산의 본질인 이공위수의 계책을 파악하지 못하고 위연이 도박성이 농후한 자오도계책을 진언하니, 이는 당연히 무시될 수 밖에 없는 사례였다. 제갈량은 소수의 병력으로득실을 보는 작전을 많이 성공시켰다. 대표적인 예로써 왕쌍과 장합을 죽인일을 들 수 있을것이다. 그들은 위국의 대표적인 상장들로써 이미 타국에도 그 명성이 널리 알려져있는 장수들이었다. 그러한 그들을 큰 피해없이 죽였다는것은 촉으로써는 이득을, 위로써는 손해를본것과 같다. 이와같이 제갈량의 북벌은 병력의 피해를 최소화한 공격으로써 수비를 대신하는 이공위수의 계책이었다. 그럼 다음으로 강유의 북벌을 보자.

A-b. 강유의 북벌 - 단순한 침략전쟁

제갈량의 북벌이 이공위수의 계책이었던 반면 강유의 북벌은 오히려 공격의 본래적인목적을 지닌 북벌이었다. 제갈량이 이공위수의 계책으로써 위의 침공을 저지함과 동시에 본래의 목적을 위해 병사손실을 최소화한 반면 강유는 꽤나 많은 병력의 피해를 입었다. 앞서말했듯이 촉과 위의 국력차는 매우 커 중국중세사에서는 6 : 1의 비율로 두고있다. 이런 와중에서 소모전을 벌인다면 결국 먼저 쓰러지는쪽은 촉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강유의 북벌이비판받는 이유는 크게 두가지로 들 수 있는데, 첫째로는 촉의 국력을 고려치 않고 북벌하여국력을 쇠하게 한점을 들 수 있으며 두번째로는 내실을 굳건히 다지지 못한점을 들 수 있다. 그는 탁월한 군인이었기에 촉으로써는 반드시 필요한 인재였다. 그러나 그는 반대로 제갈량과는 다른, 정치와 내무에는 맞지 않는 인물이기도 하였다.

《 강백약은 군사에 매우 능수능란하며, 도량과 의기가 있으며, 병사들의 마음을 깊이 이해합니다. 》- 정사 촉지 강유전 中 -

그러나 당시 촉은 구심점이었던 유비 -> 제갈량의 시대가 끝나고 바야흐로 새로운 인재의 도래가 필요한 시기였다. 또한 촉은 형주를 되찾거나, 농서로 진출하여 기회를 잡아야하였는데 형주는 동맹국인 오나라에 속해있어 사실상 형주를 취하는것은 불가능했다. 때문에 농서가 필요하였던 것이나 당시 사마의, 곽회의 옹,량주 방비는 철두철미하였다. 그러나촉은 어쩔 수 없이 농서방면을 취하였어야 했는데, 이때문에 제갈량으로써는 이공위수의 계책으로써 위의 침공을 저지하는 한편 오가 형주, 양주로 하여금 위쪽으로 치고 올라갈 타이밍을 재고있다가 자신도 맞추어 진출해 나가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만약 오나라가 적극적으로 북진에 동참하여준다면 융중대책의 과정은 진행되게 되는것이니 위국의 국력을 분산시킬 수 있었고, 그런 와중에 탁월한 자신의 전략과 위연등의 명장들을 앞세워 농서를 제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갈량이 죽어버렸기때문에 이런 계획은 그의 뒤를 이은 강유가 실행하여야 했다. 그러나 앞에서도 이야기했다시피 그는 내무에는 걸맞지 않는 인물이었다.

《 항상 대규모로 출병하려고 하여 비의는 늘 그것을 제지하며, 그에게 준 병력은 만 명에불과했다. 》- 정사 촉지 강유전 中

《 대장군 강유는 비록 계급은 진지보다 높았어도 항상 군대를 이끌고 밖에 있었으므로 조정의 정사에 직접 참여하는일은 드물었다. 진지는 위로는 황제의 뜻을 받고, 아래로는 환관이나 소인들과 사귀었으므로 유선의 신임과 총애를 깊이 받았으며 실권은 강유보다 컸다.》- 정사 촉지 진지전 中 -

상기의 두 사료는 강유가 군인으로써의 자질은 있었으나 국정을 고려하여 정사에 임하는정치가의 자질은 매우 부족했다는것을 말해준다. 촉은 강력한 법치국가로써 제갈량은 이를여러차례 예로써 보여주었다. 출사표에서도 그의 법에 관한 시각을 엿볼 수 있으며 마속과이엄에 대한 처벌역시 그 대표적인 예이다. 강유는 생활의 대부분을 한중에서 보냈기때문에성도로 귀환하여 내무를 다져 법에 의해 황호등을 미리 축출하지 못하였고 결국 촉에서 그의 전체적인 실권은 멀어져갔다. 서두에서 제갈량의 북벌이 2년주기로 실행되었다고 밝힌것은 바로 이를 위해서였다. 제갈량은 1~2년주기로 출병하였는데 그 이유로써는 국가안의 모든 소란을 스스로 나서서 제지하여야 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정치가로써의 면모를 드러내주기도 한다. 또한 촉의 실정은 이공위수의 계책으로써 시기를 기다려야하는, 그러나국력은 보존하여 성사시켜야하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강유의 군인적인 기질은 이를 시행하는데에도 여의치 않았다.

《 연희 12년(249)에 강유에게 부절을 주어 또 서평(西平)으로 출정하도록 했는데,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강유는 스스로 서쪽지역의 풍속에 익숙하며 겸하여 자기의 재능과 무력에 자부심을 가졌으므로 강족과 호족을 유인하여 자신의 오른쪽 날개로 삼으려고 하며,농산 서쪽을 위나라에서 끊어 지배할 수 있다고 말했다. 》- 정사 촉지 강유전 中 -

《 연희 18년(255)에 또 거기장군 하후패등과 함께 적도에서 나와 조서에서 위의 옹주자사왕경(王經)을 크게 격파시켰다. 왕경의 병사들 가운데 죽은자는 수만명이나 되었다. 왕경이되각하여 적도성을 지키자, 강유는 그곳을 포위했다. 위의 정서장군 진태가 병사들을 이끌고와서 포위망을 풀었고, 강유는 퇴각하여 종제(鐘題)에 주둔했다. 》- 정사 촉지 강유전中 -

《 연희 19(256) 봄에 강유는 원정에 앞서 대장군으로 승진했다. 다시 병사와 말을 정돈하고, 진서대장군 호제(湖濟)와 상봉에서 만날 날을 약속하였는데, 호제가 약속을 깨고 도착하지 않았다. 그때문에 강유는 단곡(段谷)에서 위나라 대장군 등애에게 격파되어 병사들이 뿔뿔이 흩어졌으며, 매우 많은 수가 사망했다. 병사들은 이로인해 모두 강유를 원망했고, 농서서쪽 지역에서도 소동이 일어나 안정되지 못했다. 》- 정사 촉지 강유전 中 -

강유의 지속적인 북벌은 그의 전형적인 군인의 성향, 즉 호전적성향을 깊게 내포한 북벌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국력이 위국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지는 촉으로써는 스스로 돌파구를 마련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때문에 오국이 움직여줄때까지 방어에 목적을 둔 공격으로써국력을 보존시키며 시기를 기다려야 하였음이 옳은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돌파구를마련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실패한것이다. 제갈량이 위연의 자오도계책을 기각한것도 가뜩이나 미약한 촉의 국력을 만약의 경우로써 손실시키지 않기 위해서였는데, 강유가 이러한 선례를 잊고 호제와 약속에 의지한 도박적인 군술을 펼쳤다는것은 그가 어쩔수 없는 군인이란것을 보여주고, 더 나아가 그의 북벌은 제갈량대의 취지를 잊은 독자적인 침략적인 전쟁이라는것을 알 수 있다.

* 결(結)

제갈량의 북벌과 비교하여 보았을때 강유의 북벌은 많은 차이점을 가지고, 그 차이점으로인하여 비판당할 수 있다. 일찍이 유비는 방랑의 세월을 거쳐 간신히 익주와 형주에 안착하여 촉이라는 삼국의 한축을 이루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형주가 상실되는 그 시기에 이미 제갈량이 제시한 융중대책은 변형되어 그 촛점을 오나라의 진출에 의지할수밖에 없었다. 제갈량또한 이를 알고있었기 때문에 형주를 상실한 시점에서 오나라를 우방으로 삼아 그들과 연계플레이를 노리려 한것이고, 그 와중에 위나라에 침략받지 않기 위한 이공위수의 북벌을시행한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 이후 그의 취지는 전혀 다른 기질을 가지고 신진파로써등장한 강유에게 이어지게 되고, 그 결과 본래의 목적을 잊은 침략적인 북벌로 인해 촉의국력은 점차 깎여가 멸망당하고 만것이다. 강유는 뛰어난 군인이었으나 정치가는 아니었기에 당시 역습적 전략을 구사해오던 촉에게는 다소 맞지 않는 인물이었으며, 실지로 군인에가까웠기때문에 내부에서 진지, 황호등의 간신들이 판치는것을 제지하지 못하였다. 강유의북벌은 첫째로 6:1의 비율로써 열세이던 촉의 국력을 고려하지 않았다는점에서 비판당할만하고, 둘째로 법치국가였던 촉에서 제갈량의 선례를 따르지 않고 내실을 다지지 못하고 그저 전쟁만 펼쳤다는 점에서 비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출처 : 네이버 지식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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