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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삼국지 말기의 명장들

김창식 2012. 10. 24.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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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60권 짜리 삼국지를 읽거나 이문열 삼국지, 고우영 삼국지, 한권으로 읽는 삼국지 등을 읽어보았을 것이며, 현재 12탄까지 나온 코에이사의 삼국지를 PC로 해보았을 것이며, 혹여나 옛날 오락실에서 코인 삼국지를 해본 사람도 있을 것이며, 집에 플스가 있다면 진삼국무쌍을 해본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정말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오래도록 많은 곳에서 관심을 가져온 삼국지. 하지만 삼국지의 말기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물론 필자도 삼국지를 그저 만화로만 읽고 인터넷에서 여러 자료를 읽거나 게임의 열전 등을 통해서 지식을 습득하였기 때문에, 삼국지의 말기에 대한 지식은 정말 초보에 불과할 것입니다.

 

삼국지 말기에 대해서 갑자기 생각하게 된 계기는 PC삼국지 게임 때문입니다. 코에이사에서 출시하는 삼국지 게임은 그 장수들에 대한 능력치가 상당히 세심하게 부여되어 있어서 새로운 버전이 출시될 수록 그 능력치가 조금 더 삼국지연의나 정사 삼국지의 평가에 맞추어지고 상대적인 비교도 잘되어 가는 듯 합니다. 기어이 코에이 코리아는 한국에 패키지 시장이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철수하였지만, 어찌어찌하여 삼국지 12를 해보았는데, 조금 안타까운 점이 있었습니다. 삼국지 말기의 시나리오가 사라졌다는 점입니다. 몇몇 장수는 사라지기도 한듯.... 시나리오가 사라진 계기를 어디선가 본적이 있었는데, 삼국지 후반부의 시나리오가 너무 인기가 없어서 안만들었다고 하네요 ㅡㅡ

 

대체로 삼국지 게임을 하면 군웅할거나 영웅집결 시나리오를 많이 하기 때문에 내가 알만한 장수수도 적은데다가 나라도 꼴랑 세개 있는 삼국지 후반부는 정말 인기가 없을 것이라 생각은 듭니다. 그런데 이렇게 삼국지의 말기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 저 같은 사람은 별수 없이 옛날 버전의 삼국지를 합니다. 대체로 완성도가 높은 삼국지 9를 많이 합니다. 왠지 장수제는 자꾸 먼치킨으로 나가서 금세 지루해 져서 ㅋㅋ 삼국지9의 마지막 시나리오는 촉한의 장수가 무려 33명에 불과한 데다가 그 질 또한 만만치 않게 나빠서 하는 사람에게 짜증을 유발시키지만, 저는 거기에다가 신규장수 몇명 넣고 열전도 쓰고 해서 나름대로 참 재미있게 플레이했습니다.

 

연의삼국지를 많이 읽다보니 촉한이 참 안타깝게 느껴져서 이기도 하겠지만, 어찌되었건 이렇게 많이 하다보니 삼국지 말기의 명장들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요, 익히 알고 있는 장수도 있지만 조금 관심있게 더 찾아보아서 기술해보았습니다. 나름대로 능력치도 매겨보았는데, 재미에 주관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ㅋㅋㅋ

 

1. 강유(백약)

 

 

촉한의 최후의 야전사령관인 강유는 연의나 정사에서 문무를 겸비한 명장이라고 잘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인터넷의 자료들을 많이 살펴보면 강유와 그의 숙적 등애와의 비교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종합적인 능력치로 고려해 본다면 등애가 우위에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평가해 보지만, 절대로 강유를 낮게 평가하는것은 아닙니다. 무예의 면에 있어서는 강유가 위나라에 있었던 시기에 제갈량과 전투를 벌이면서 조운과 호각지세로 싸웠다는 점에서 꼭 무예가 출중하다고 평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당시 조운의 나이가 많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때의 조운도 훌륭한 무장이었을 것입니다. 여하튼 제갈량 사후 강유는 많은 전투를 치르면서, 위의 장수들과 싸워서 한번도 뒤지는 싸움을 해본적이 없습니다. 시대를 풍미하는 관우나 장비 여포 같은 명장은 삼국지 초기에만 나오고 후기에 잘싸우는 강유와 같은 무장이 게임에서  무력을 89라고 해둔 것은 조금 낮게 평가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강유와 등애의 결전에서 강유가 등애를 이긴 적이 거의 없다고 하지요. 하지만 등애는 강유를 상당히 경계하고 되도록이면 강유가 없는 곳을 공격하여 승리를 하려고 했습니다. 사실 제갈량이 북벌을 하면서 사마의를 제대로 이긴것은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상 사마의가 승자이죠. 어떠한 전쟁에서도 공격하는 쪽이 당연히 불리합니다. 또한 국력차이가 상당한 촉한이 위에게 계란박치기를 하는 꼴이라서 그저 등애가 강유보다 낫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더구나 강유는 되도록이면 촉의 국력을 손실시키지 않는 면에서 최대한 공격하려고 힘을 썼습니다. 둔전을 일군다거나, 이민족을 병사로 사용하는 등 자급자족하면서 공격을 시도하다보니, 막대한 힘을 쏟았던 제갈량 보다 훨씬 더 미미한 공격에 그쳤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촉의 국력은 점점 피폐해져 갔습니다. 어디 쳐들어간다는게 국력의 소모를 초래하지 않을 수는 없는거죠. 그런데 그렇다고 팔짱끼고 망하기를 기다릴수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방법이 잘못된 것일 수는 있겠지만요.

 

강유가 내정에 상당히 재능을 발휘한다거나 정치적으로 크게 영향을 미친 부분은 눈에 띄지 않습니다. 더구나 북벌을 계속 꺼리고 미루며 촉의 국력 향상에 대단히 힘을 쓴 비의가 죽자마자 바로 북벌을 결심하고서는 이후에 촉의 내정에 신경을 거의 쓰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정치적 능력은 별로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촉한의 멸망에 조금 더 다가가는데 강유가 한몫했다는 것이 이 부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강유가 어처구니 없게도 한중에 대군을 포진하지 않고 청야작전을 펼쳐서 너무나 손쉽게 한중을 뺏겨버린 이후로 검각까지 밀려버리게 되고 검각에서 종회를 상대하고 있었습니다. 검각의 지형이나 수비 포진이 훌륭하여 종회의 10만대군은 꼼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때 등애가 몇만도 안되는 병사로 음평의 샛길을 고속으로 돌파하여 결국 촉한의 황제 유선의 항복을 받아내게 됩니다. 한중이 지형상 대단히 수비하기 훌륭해서 그곳에 대군을 두고 수비를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는데, 그것이 적에게 많은 타격을 주기 어렵다고 판단해서 병사를 분산시켜 놓다보니 결국 엄청난 패망의 결과를 불러 일으킨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여담이지만 촉한이 멸망한 직후 등애는 멸망한 촉한의 사대부들에게

"강유는 본래 한 시대의 영웅이었지만, 나를 만났기 때문에 곤궁해진 것일 뿐이다."

라고 하였는데, 이 말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등애를 비웃었다고 합니다. 이후에 등애는 사실상 강유의 모사에 빠져서 죽음을 당하고 맙니다.

 

강유는 촉한 멸망 후 촉의 재건을 위한 모사를 꾸밉니다. 종회와 의형제를 맺고서는 등애를 배반자로 몰아서 낙양으로 호송시킵니다.(종회 본인이 촉한 멸망에 일등공신인 등애를 대단히 질투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전술전략에 능하고 학문에 정통했던 종회가 사람보는 눈은 없었는지, 희대의 명장인 강유에게 휘둘려서는 본인이 장안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사마소에게 반기를 들게 되는데요, 여기서 종회 부하들의 배신으로 그 반기가 실패로 끝나게 되고, 종회의 반란을 계기로 촉한을 부흥시키려던 강유의 계획도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정사에서 강유는 결국 사마소에게 붙잡혀 가 참수당했다고 합니다. 촉의 최후의 명장은 그 최후조차도 참으로 비통하였습니다.

 

필자의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능력치는 삼국지 9 기준입니다)

 

통솔 85 -> 88

무력 89 -> 92

지력 92 -> 93

정치 66 -> 49

 

2. 나헌(영칙)

 

 

이번에는 사실상 대단히 듣보잡 장수인 촉한의 나헌이라는 장수에 대해 소개를 해보고자 합니다. 나헌은 무장인데도 불구하고 성품이 대단히 바르고 박식하였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많은 관직에 오르고 오나라의 사신으로 가서 칭찬을 많이 받았다고 하네요^^ 곧은 성품이 문제가 되어서 그 당시 촉한의 대실세였던 환관 황호에게 동조하지 않아서 오래 복무만 하였지 별로 재능은 없는 염우라는 장수의 부장으로 임명되는 굴욕을 맛보게 됩니다. 파동 태수라고 익주의 영안 근처입니다. 촉한이 멸망할 시기 즈음에 염우가 성도지방으로 가면서 나헌에게 수천의 병력을 주고 영안의 수비를 맡깁니다. 그래서 그 지역을 수비하던 중 촉한이 멸망을 하는데요, 이를 지켜보고 있던 오나라가 익주지역을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킵니다. 여기서 뒤에서 설명할 오의 최후의 명장 육항이 보협, 유평, 성만 등과 수만의 병력으로 출진하게 됩니다.

 

이런 위기속에서 침착하게 백성들을 진정시킨 나헌은 고심한 끝에 자신의 황제가 항복한 위에 항복하기로 결심하고, 오의 육항을 막기로 합니다. 또한 위에 사신을 보내어 원군을 요청합니다. 1차로 침공한 보협을 출전하여 대파한 나헌에게 열받은 오의 황제 손휴는 육항에게 성을 포위하라고 명하고 재차 공격을 시도하게 합니다.

조금 뜬금 없는 소리겠지만, 고조선 말기 우거왕 시기에 한나라에서 쳐들어 왔는데 왕검성에서 거의 1년을 저항한다고 하지요. 그 당시 고조선은 중계 무역으로 대단히 부강한 국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ㅋㅋ

그런데 나헌은 2천정도 되는 병사로 3만의 병사를 6개월 가량 수비해 냅니다. 성안의 사람들 절반은 병에 걸렸으며 나헌 자신도 요격을 하면서 많은 부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결국 6개월 가량이 지난 시기에 이 내용이 진왕 사마소의 귀에 들어가고, 결국 위의 장수 호열이 병사를 이끌고 와서 나헌을 구했다고 합니다.

 

학소가 진창성에서 수비를 했을 때 3천의 병사로 제갈량의 10만 병사를 20일 동안 수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헌은 2천의 병사로 3만 병사를 6개월간 수비했다는 점에서 학소보다 더 높게 평가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오나라가 물자보급이나 원정에 대해서 미흡했다고 생각 할 수도 있겠지만, 오나라의 마지막 기둥이었던 육항을 상대로 막았다는 점에서 그 평가가 감할 이유가 없습니다. 비록 촉한은 망했지만, 자신도 의리를 지켜서 촉에 침공해 온 오나라를 필사의 저항으로 막은 나헌은 삼국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꼭 알고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필자의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

 

통솔 80 -> 89

무력 70 -> 70

지력 75 -> 78

정치 70 -> 70

 

3. 등애(사재)

 

 

이번에는 위의 명장 등애에 대해서 설명하려 합니다. 등애는 그래도 여러모로 알고 계신 분들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모든이들의 촉한을 멸망시킨 장본인이 바로 이 등애이기 때문이겠지요. 사진을 보니 포스가 장난아닙니다만, 등애는 그 어린시절 환경이 상당히 불안정했습니다. 부모를 일찍 여읜데다가 말더듬이라서 비웃음을 많이 샀다고 하네요.

 

등애의 일대기를 살펴보면 군사전략가의 기질이 다분히 보이지만, 방비를 튼튼히 하기 위한 내정에도 소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수춘 지역에 운하를 이용해 물을 끌어 들여서 식량생산을 증진시키는 방안인 제하론을 지어서 사마의에게 바쳤던 것이지요. 사마의는 이때 등애를 알아보고 발탁해서 쓰기 시작합니다. 아무쪼록 이때부터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게 됩니다.

 

등애는 제갈탄의 반란에서 활약상을 보이며 촉한과의 국경으로 배치됩니다. 제갈탄의 반란은 위나라의 실권을 좌지우지 하고 있는 사마소에 대한 반란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여기서 당시 최고의 맹장이라 평가되는 문앙과도 싸움을 벌이게 됩니다. 문앙은 적병 수백명을 단기필마로 사살하며 조운과 비견될 만큼 용맹한 장수였는데요, 이를 통해 보아서도 등애가 무예도 출중한 인물임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후일 촉한의 명장 강유와의 승부에서도 대등하게 싸워냅니다. 물론 군사전략에 있어서는 강유의 출병을 모두 막아낼 정도로 훌륭하였습니다. 국력의 차이가 정말 대단히 상당했지만 말입니다. 사실 촉한은 병력의 징집이나 물자 운반이 대단히 열악하죠. 익주의 그 험한 산세에서 국력을 키우고 군수물자를 옮기는게 쉬운일이 아니긴 합니다. 여하튼 등애는 강유를 상당히 경계하여 늘 방비를 소홀히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후 촉한 정벌전에서 등애가 큰 공로를 세우게 됩니다. 한중방어에 소홀히 한 강유를 격파하고 검각의 수비가 대단히 굳건한 것을 알고는 음평의 길을 통해 성도를 직접 공격하였습니다. 인터넷에 몇분이 올려주신 이 지역의 사진을 보면 차마 인간이 다닐 수 없는 그런 길입니다. 그런데 그 길이 무려 7백여리에 달한다고 하지요. 이 지역에 촉군 백명만 있어도 등애를 막을 수 있었다고 하니 그 험준함이 조금이나마 실감이 납니다.

 

이렇게 험준한 지형을 돌파해서는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이 지키는 면죽관을 격파하고 성도로 진군하니 그 용병술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촉한이 결국 항복의 의사를 전하고 등애는 성도에 들어가게 되는데요, 이 때에도 약탈방화를 금하고, 항복한 장수들을 받아들이고 민심을 안정시켜 사람들의 환호를 받았다고 합니다.

 

정말 대단한 장수지요. 무엇하나 빠짐이 없는 장수입니다. 말더듬더듬 하지만 등애도 촉한을 정벌하여 강유를 이겼다는 자신에 차 오만해져서는 자신이 강유보다 상급의 장수라 평하며 촉한의 사대부들에게 자신의 관대함을 자랑하였습니다. 하지만 종회는 등애가 자신보다 전공이 높은데다가 등애가 태위의 자리로 승진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질투심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종회는 위의 재상 종요의 아들에 어렸을때부터 촉망받던 엘리트인데 반해 등애는 말더듬이에 바닥에서 올라온 인물이니 자신의 자존심에 큰 스크래치를 받았을 수도 있었을 테지요.

 

아까 강유편에서도 잠시 언급이 되었지만 등애의 말로는 비참합니다. 종회의 모함을 받아서 역적으로 오인을 받아 자신의 아들인 등충과 함께 낙양으로 호송됩니다. 이 때 종회가 강유의 모략에 빠져 성도에서 반란을 일으키게 되고, 종회 역시 자신의 부하의 배신으로 인해 죽게 됩니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시기에 종회의 부하 몇몇이 자신들이 억울하게 등애를 모함한 사실이 들키는 것을 두려워 하여 등애를 암살하게 되는 것이지요. 많은 분들이 써주신 글들을 보고 등애와 종회에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접하게 되었습니다만, 이를 보고 무엇보다도 사람들은 겸손해야 한다는 덕목을 깊이 느꼈습니다.

 

필자의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

 

통솔 91 -> 91

무력 88 -> 90

지력 92 -> 92

정치 76 -> 79

  

4. 양호(숙자)

 

 

이번에는 양숙자 선생님을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사실 양호는 위말 진초의 장군이죠. 활약은 진나라에서 본격적으로 하게 됩니다. 양호의 초기시절에 대해서는 크게 소개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어렸을때 학문에 뛰어났으며, 좋은 평가를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후에 하후패의 눈에 들어 하후패의 딸과 결혼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에 사마소에게 중용이 되어 총애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후 사마소는 오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양호를 양양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양호가 양양에 처음 부임하였을 때에는 임지에 있는 군량이 100일치도 안되었는데, 밭을 많이 개간해서 10년치 군량으로 늘렸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 일대에 인심을 얻고 오나라와 전투를 벌여서 항복한 사람들이 고향에 돌아가길 원하면 그대로 보내주었다고 합니다. 또한 병사들에게도 자신을 편하게 생각하도록 자신의 호위 병사수를 줄이고 갑옷차림으로 다니지 않았다고 합니다. 


양호는 오나라의 명장 육항과의 전투에서 크게 패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게 서릉전투인데요, 그와 관련해서는 육항편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양호는 육항과 적이지만 대단히 친분이 높은 사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신의 있게 서로 날짜를 정하여 싸우고, 기습은 하지 않았다고 하네요. 진나라 병사가 오나라에서 베어온 곡식의 값을 비단으로 물어 주기도 하였고, 사냥도 진나라 영역에서만 했다고 합니다. 그의 인품에 오나라 사람마저도 감탄했다고 합니다. 


양호의 이런 모습을 본 육항이 양호가 술을 좋아한다고 하여 술을 보내주었는데, 많은 부하들이 독이 들어있을지도 모르니 마시지 말라고 했지만, 기꺼이 혼자서 한독을 다 비웠다고 합니다. 또한 육항이 아프다고 하니까 약을 지어 보냈는데, 육항의 부하들도 약에 독이 들어있을지 모르니 먹지 말라고 했지만, 기꺼이 먹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육항과 친분이 깊어도 육항이 있어서 오나라를 침공하지 못하고 기회만 엿보고 있었는데, 육항이 병사하게 되자, 황제가 된 사마염에게 오나라 정벌을 건의 합니다. 하지만 진의 일등공신인 가충 등에게 반대를 받아서 결국 좌절하게 되지요. 그후 지속적으로 오나라 정벌을 건의하지만 양호는 서서히 병들게 됩니다.


이후에 양호는 춘추좌씨전을 애독하기로 유명한 두예를 자신의 후임으로 천거하였으며, 얼마안가 병사했다고 합니다. 양호는 사마염이 남성군후로 봉하려 하자 애써 거절했다고 합니다. 또한 자신이 죽어서도 봉해지는 것을 사양하여 자신의 관속에 남성후의 도장을 넣지 말라 하였답니다. 


그가 죽었을 때 그 지방사람은 물론 오나라 사람들도 상당수가 슬퍼했다고 합니다. 그 백성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비와 묘를 세웠는데, 그것을 타루의 비라고 하여, 비석을 보는 사람 마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삼국지의 덕장이라고 소문난 유비에 버금가는 덕망을 가진 양호는 이후에 사마염이 오나라를 멸하고 신하들이 축하의 술잔을 올리자 사마염은 오나라의 정벌이 양호의 공로라 칭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필자의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

 

통솔 87 -> 94

무력 69 -> 51

지력 91 -> 85

정치 86 -> 93

 

5. 두예(원개)

 


두예는 양호의 추천으로 그의 후계자가 된 진나라의 장군으로 오나라를 멸망시킨 장본인입니다. 원래 두예는 정계에 진출을 하지 못하다가 사마의의 사위가 되면서 벼슬을 얻게 됩니다. 두예는 정말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을 보이게 됩니다. 그가 탁지상서라는 벼슬에 있을때에는 중국 북부지역이 홍수나 메뚜기로 인한 피해를 많이 입었는데, 두예의 해결책을 시행하자 백성들이 유익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것 외에도 한일이 정말 많으며, 박식하여 그 시대의 사람들은 마치 갖가지 무기가 들어찬 창고와 같다고 하여 두무고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양호가 오나라를 정벌하자고 주창하였을 때에는 찬동하였으나, 위의 중신들이 대부분 반대하여 이루어지지 않다가, 양호가 죽은 이후에 자신이 오나라 정벌을 추진하게 됩니다. 두예는 강릉지방을 공략하여 형주를 평정하게 되는데 이때 유명한 고사성어가 나오죠. 진의 장수인 호분이 봄이 오면 강물이 불어나 오래 머물기 어려우니 겨울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공격하자고 하였는데, 이 때 두예가 당시의 상황이 대나무를 쪼개는 것과 같아 몇 마디만 쪼개면 전부 쪼개지는 것과 마찬가지 이므로 당장 공격해야 한다고 하여 건업을 향해 진격하게 합니다. 이것을 파죽지세라고 하지요.


그럼에도 진의 가충을 비롯한 중신들이 오의 정벌을 미루자고 주장하였으나, 그는 의지를 꺾지 않았으며, 마침내 오의 수도 건업을 점령하고 오의 황제 손호를 잡아 낙양으로 보내니 오나라가 멸망하고 진나라가 전 중국을 통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후에도 두예는 자신들의 병사에 대한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형주에서 운하를 파고 관개를 하여 농사를 장려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또한 춘추좌씨전을 애독하여 좌전벽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후 춘추좌씨전의 가장 오래된 주석서인 춘추좌씨경전집해, 춘추석례 등을 저술하였습니다. 이 저서는 지금도 이 학문분야의 기본적인 주석으로 꼽힌다고 합니다. 


두예는 정말 많은 부분에서 박식하고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무예에는 그렇게 뛰어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말에서 떨어졌다는 기록도 있다고 하네요. 아무래도 후대의 사람들이 학자이자 정치가로 평하는 것을 보면 전형적인 지휘관 스타일일뿐 앞에 나서서 용맹하게 싸우는 장수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필자의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

 

통솔 85 -> 85

무력 66 -> 52

지력 84 -> 90

정치 81 -> 88

  

6. 육항(유절)

 

 

마지막으로 오나라 최후의 명장 육항에 대하여 설명하려고 합니다. 오의 명장 육항은 위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양호와의 절친한 관계로 이미 소개가 되었습니다. 육항은 오나라를 이끈 명장 육손의 차남입니다. 장남이 일찍 죽어서 육항이 대를 이었다고 하죠. 그는 육손처럼 형주를 수비하였는데, 그 당시에 위가 촉을 병합하게 되고, 서서히 사마씨가 위를 장악하게 되지요. 그러면서 등장한 진나라의 공격을 여러차레 방어하면서 그 지역 백성들의 신망을 얻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승리를 한다고 하여도 우쭐대거나 교만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이 즈음에 등장한 위의 제갈탄이 반란을 일으켜 오에 항복하게 되니 위에서 이를 제압하기 위해 사마소와 종회가 수춘을 공격하려고 합니다. 이때에 육항은 시상에서 위군을 격파하고 정북장군에 임명이 됩니다.

 

촉의 장군 나헌도 육항과 마주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아까 언급하였지만, 촉이 망하고 영안을 공격할 때 육항이 나헌이 지키는 영안성을 포위하였었습니다. 조금 더 공격하였다면 점령할 수 있었겠으나, 사마소가 군사를 파견해 오의 요충지인 서릉을 엿보자 물러나 수비를 강화하였다고 합니다.

 

육항이 지키는 형주는 굳건하였지만, 오나라는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나날이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환관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 것입니다. 더구나 오의 황제 손호는 포악하기 이를데 없어 간언하는 자들이 하나둘 줄어가기에 이릅니다. 이때도 육항은 손호에게 상소하여 올바른 자를 쓰도록 간언합니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정치상황이 계속 되니까 반란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로 인해서 발생한 전투가 서릉전투 입니다. 서릉독을 맡고 있었던 보천이라는 장수가 건업으로 소환명령을 받게 되자 자신을 해하려 하는지 의심하게 되어 진나라에 투항하게 됩니다. 이 당시 위나라는 멸망하고 사마염이 진을 세우게 되지요. 아무튼 육항은 바깥에는 진나라의 공격에 안으로는 반란군의 공격을 막아야하는 상황에 닥치게 됩니다.

 

결국 서릉에서 궁지에 몰리게 된 육항을 제압하기 위해 진나라는 거기장군 양호를 파견하여 강릉을 공격하게 합니다. 그 당시에 양호는 군수물자를 모두 배로 운반하였는데, 육항이 이를 알고는 제방을 터트려 물을 빠지게 하여 육로로 군수물자를 운반하게 하여 힘을 소비하게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쳐들어오는 병력이 상당하여 오의 장군 주교와 유찬이 투항하였습니다. 이들이 진나라에 이민족 병사로 구성된 부분이 약하니 그곳을 쳐야한다고 정보를 흘렸는데, 육항이 이를 간파하고 군사의 배치를 바꾸어 진의 장수 양조를 크게 격파합니다.

 

이렇게 바깥에는 진의 대군이고 서릉성 내부에는 보천의 반란군이 득실거리는데도 불구하고 바깥과 안의 이중성벽을 쌓아서 수비를 하며 양조를 격파한 뒤에는 빠르게 서릉성 안의 보천을 격파하고 그의 3족과 대장들을 사살합니다.

 

하지만 육항은 그외의 죄는 모두 사하였고, 엄청난 전투에서 승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교만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에 많은 장졸들의 지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에 진나라는 오의 육항이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표면적으로 교린정책을 채용하여 겉으로 친한척 하면서 오의 군사를 경계하여 양호에게 진을 지키게 합니다. 그런데 오의 황제 손호는 감히 오의 국력이 강력해 졌다고 생각하여 진을 정벌하려는 야심을 갖게 됩니다. 손호는 그러면서 자주 진의 국경을 침범하며 국력을 낭비하게 되니 육항이 간언하여 이를 저지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손호의 미움을 사게 됩니다.

 

또한 육항이 양호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인하여 진의 첩자로 의심을 받게 되니, 손호가 극도로 불신하여 좌천시켜버리게 됩니다. 결국 억울함이 극에 달한 육항은 죽음에 이르게 되는데, 그 임종직전에까지 손호에게 상소를 올립니다.

 

상소의 내용은 즉 오나라의 국경지대인 서릉과 건평의 수비를 강화하라는 것이었으나, 손호는 이를 곧이 들으려 하지 않았고, 육항이 죽어 풍전등화가 되고만 오나라는 결국 두예와 왕준의 공격을 받고 멸망하게 됩니다.

 

촉의 제갈량이 있어서 멸망하지 않았듯이 오나라에도 이렇게 육항이라는 대들보가 있었기 때문에 그 국가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촉과 오가 무능한 군주에 의해 멸망하였다는 점에서도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겠습니다.


 

필자의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

 

통솔 90 -> 93

무력 55 -> 55

지력 92 -> 94

정치 85 ->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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