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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웅 이순신 장군에 대한 간단 정리! 본문

역사 이야기

성웅 이순신 장군에 대한 간단 정리!

김창식 2009. 1. 2.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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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이야기 할 인물은 조선의 성웅 이순신이다.
이순신이라면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조선 최고의 장군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필자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중에 한명이다.

뭐 이순신 장군이 백원짜리에 그려져있는 것을 보면 세종대왕이나 퇴계이황보다 덜 유명하구나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난 아니라고 본다. 사실 필자는 예전에 이 인물이 이순신이었는지도 몰랐지만 말이다..

하나하나 이순신에 대하여 짚어 가도록 하자.


거북선

이순신이라하면 거북선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을 사용한 적은 좀 드문 편이었다. 현대에는 그 거북선이 내부가 어땠으며 구체적으로 어떠한 모양을 하고 있는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예전에 동전에 거북선이 그려져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나도 오래 되어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전투기록을 보면 거북선은 철갑선이라 침몰하지 않는 배라고 인식이 되어 왜군이 겁을 집어먹는 주요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럼 거북선의 장점을 한번 보도록 하자.

기존의 전선들이 좌우로만 포를 쏠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거북선은 선두(船頭)에 해당하는 용머리에서도 대포를 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적선들과의 충돌에도 버틸 수 있는 탄탄한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어 충돌공격에도 능하여, 적진 속으로 들어가 적선들과 부딪히며 포를 발사하는 탁월한 공격능력을 구사할 수 있었다.

거북선은 16세기 말 세계의 어느 해전에서도 찾을 수 없는 매우 독특한 형태의 전함이었으며, 어느 나라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과학적인 전투함이었다. 특히 거북선의 건조 시기가 임진왜란 직전에 이루어짐으로써 왜군의 전법에 대한 치밀한 연구가 있었고, 이를 토대로 하여 기존 전선을 개량·개조시켰다는 데 그 의미가 더욱 크다. 또한 이 거북선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라 할 수 있으며, 이순신의 위상을 더욱 높이게 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수군 양성

이순신의 어릴적 일화나 어떻게 전라 좌수사가 되었는지는 뭐 그렇게 관심사가 아니니까 생략하도록 하자. 이순신은 무과에 합격하여 각지에 관리로 파견이 되다가, 전라좌수사로 임명을 받게 되는데, 사실 일본의 침략의도를 조선이 몰랐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닐 것이다. 당파 싸움 하느라 신경을 못썼던 것이지, 예나 지금이나 고위 관직끼리 편먹고 싸우는 것은 비슷한가 보다. 그런 조정을 무시하고 이순신은 왜군이 침략할 것을 대비하여, 군사와 식량을 모으고 수군으로 양성하여 훈련을 시작한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 보면 물에만 빠져도 허우적 대는 병사들을 잘 훈련시켜 해전에 능숙하게 하는데, 이러한 훈련이 있었기 때문에 전투에서 대단한 성과를 낼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이와 동시에 판옥선을 건조하고 거북선을 고안하여 이미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모든 준비를 마쳤다고 하니 정말 준비성이 철저한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후에 일어나는 전투에 대해서도 상당한 준비와 치밀한 전략을 짰다고 하니 이런 점에서 이순신이라는 인물의 섬세함과 치밀함 철저한 준비성등을 알아 볼 수 있겠다.


임진왜란 그 이후 공적

일본은 역시 예상대로 엄청난 병력인 무려 20만을 이끌고 부산에 쳐들어 오기 시작 하였다. 개미떼 같이 몰려오는 일본군에 조선군은 그저 속수무책으로 방어선이 뚫리기 시작 하였으며, 수도인 한양마저 결국 쉽게 함락당하고 말았다. 이러한 패전이 난무하는 상황속에서 오직 하나의 승전보 만이 빛을 발하게 되는데 그것이 이순신의 첫 출진이자 첫 승이었다. 사실이 경이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이순신은 전투에서 아군의 사상자라거나, 파괴된 함선이 거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승리가 보장되지 않으면 절대로 전투를 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후대에 말이 많은데. 승리가 보장되지 않는 전투는 일부러 피하고 이길것 같은 전투에만 참여한 것이 아니냐라는 것이다. 이는 반박할 가치도 없는 것이, 이기지 못할 싸움을 일으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전투에서 직접 나가 싸우면서 경험이 몸에 벤 장군이 그 전장의 상황을 잘알지 어찌 조정에서 침이나 튀겨가며 싸우던 관리들이 무엇을 안다고 전투를 하라고 명령을 하겠느냐.. 좀 문제가 있다.

 이순신은 제 9차출전 즉 마지막 명량해전 까지 대략 6여년간을 싸우면서 절대로 진적이 없었다. 23전 23승 뭐 효도르보다도 더 완벽한 승률을 재현해 낸 것이다. 

 그럼 이순신의 유명한 해전인 한산도, 명량 해전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자.
 
 우리가 아는 가장 유명한 전투인 한산도 대첩은 멸망의 위기에 처한 조선을 살린 중요도가 상당히 높은 전투라고 할 수 있다. 이순신은 며칠간의 생각 끝에 왜군을 유인하는 작전을 써서 좁은 울돌목을 지나 넓은 한산도 앞바다로 끌어들여 학익진을 펴서 순식간에 40여척의 배를 격침시키게 되었다. 이 학익진은 육상에서만 쓰던 기술이었는데 이것을 해전에 도입함으로써그 당시 해전사에서는 상당히 획기적이고 독창적인 전술이었고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전술이다. 이 전투의 승리로 인하여 조선군은 반격의 기회를 맞이하게 되고, 한편으로 왜군은 해상을 통한 보급로가 차단이 되어 임진왜란은 그 전세가 완전히 뒤집히게 된다.
 
 이 한산도 대첩은 세계 4대 해전이라고 불리워 지고 있으며, 영국의 해군 사관학교에서도 그 이름이 실리고 있다. 

 이순신이 백의 종군 할 당시 원균은 칠천량해전에서 대다수의 병력과, 함선을 잃고 수많은 장수들을 잃고 자신도 목숨을 잃었다. 결국 이순신이 복직하게 되고, 남아있는 열두척의 배를 이용하여 또 한번의 미스터리한 기적을 일구어 내는데 그것이 명량해전이다. 당시 일본군의 함대수는 133척이었는데, 그 병력도 조선군의 수십 수백배에 이르렀다. 이순신은 주변지형과, 급물살, 쇠사슬을 이용한 함정을 설치하여, 일본군 전선 31척을 격파하고 18600여명을 도살하는 대전과를 세우게 된다.


백의종군

이순신이 두번에 걸친 백의종군을 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첫번째 백의 종군은 좀 생소한 느낌이 있는데 이것은 이순신이 함경도에서 일했던 시절에 있었던 일이다.

1차 백의종군

42세에 이순신은 종4품의 관직인 조산보만호로 임명되어 함경도 경흥으로 파견되고 그 이듬해에는 북쪽지방의 녹둔도지역의 농토까지 관리하는 둔전관을 겸하게 되었다.

녹둔도의 병력이 적은 것을 염려한 이순신은 북병사 이일에게 군사를 증원시켜줄 것을 거듭 요쳥하였으나,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고 난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여진족들이 이 녹둔도를 공격하게 되었는데, 이 치열한 전투에서 많은 병사들이 죽고 이순신도 오른쪽 다리에 화살을 맞아서 부상을 입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장을 죽이고 적군을 추격하여 백성 60여 명을 구출하였다.

이일은 이 전투의 피해가 이순신의 원군요청을 거부한 자신의 잘못이라 생각하여 거짓장계를 조정에 올리게 되고 결국 지난날의 공적을 참작하여 백의종군을 명받게 된다. 이 다음해 1월에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우게 되어 다시 복권되게 된다.

2차 백의종군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후 이순신은 여러공을 세우게 되었고 왜군의 수군은 거의 힘을 쓰지 못한채 이순신을 몰아낼 계책을 궁리하게 되었다. 그들은 조정의 당쟁과 원균이 충무공을 시기하고 모함하는 미묘한 관계를 교모히 이용하여 그를 제거하려 하게 된다.
그렇게 하여 짜낸 계책이 첩자를 이용한 모함작전이다. 수군대장 고니시는 그의 부하인 요시라를 첩자로 보내게 되는데 평소 친분이 있었던 김응서에게 가서 "가토의 부대가 어느요일에 바다를 건너 올 것이니 해상에서 맞아 싸워달라."는 정보를 제공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것이 왜적의 간계임을 간파한 나머지, 척후선을 보내어 정탐케 하고 직접 출전하지 않았다. 고니시는 다시 요시라를 시켜 김응서에게 편지를 보내게 되는데, "가토가 도착하였다는 사실과 기회를 놓쳤으니 안타깝다"라는 내용을 써서 전달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이순신을 모함하는 사람들이 조정회의에서 이순신을 비방하였고, 결국 이내용이 발단이 되어 이순신은 조정으로 압송되고 수많은 고문을 받게되고 극형을 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정의 정탁, 류성룡의 청원으로 극형은 간신히 면하게 되고, 결국 출옥하여 백의종군을 하게 된다.

....2차 백의 종군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도 논란이 되는 점이 많이 있으니 인터넷을 검색해 보세요 ^^


이순신과 선조, 노량해전.

 임진왜란에 대한 선조는 아주 무능하기 짝이 없는 군주로 평가된다. 왜군의 공격에 대한 대비책은 전혀 세우지 않은채 당파싸움에만 휩쓸렸던 선조는 결국 임진왜란을 맞이하게 되고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한채 북쪽으로 도망가기 시작한다. 본토에서의 수많은 패전 소식에 패색이 짙어가는 선조는 한통의 승전소식을 받게 되고 그것이 이순신의 승전보인 것이다. 그 이후의 전투에서 선조를 단 한번도 실망시키지 않은 이순신은 되려 선조의 시기와 질투를 받게 된다. 사실 그 당시의 이순신의 인기는 국왕의 자리도 넘볼 만큼 높았을 것이다. 백성들을 버리고 피난을 가버린 국왕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해전영웅과 비교하는 것이 되려 걸맞지 않는다.

 결국 선조는 갖은 모함과 시기를 내세워 이순신을 처형하려 하였지만, 이순신은 임진왜란에서 절대적으로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기 때문에, 그도 어쩔수 없었다. 그와 반면에 이순신은 명석한 두뇌를 바탕으로 치밀한 전략과 거북선을 만들어 내었고, 전쟁을 예측한 훈련, 군비마련 등을 미리 행하였으며, 임진왜란의 전 장수를 통틀어서 보기드물게 청렴하고 강직한 군인이었다. 이런 이순신은 일본의 어설픈 첩자공작에 휘둘려 선조에게 압송되어 갖은 고문을 당하게 되고 백의 종군을 당하는 치욕을 겪게 되었고, 그 때 원균이 왜군에게 패배하게 된다(칠천량 해전). 조선수군은 왜군에게 갖은 수모와 치욕을 겪게 되고, 선조는 이순신을 필요로 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돌아온 이순신은 다시 삼도 수군 통제사로 임명 받고,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군을 격파(명량해전)하여 또 다시 왜군을 겁에 질리게 만든다. 이후 이순신은 수군 재건에 힘을 쏟게 되고, 칠천량 해전 이전의 수군력을 회복하게 되었다.

 다시 본토로 돌아가려는 왜군은 이순신의 철통같은 방어에 회군의 엄두를 내지 못하고, 계속하여 뇌물공세를 펼치게 되지만, 이순신의 강직한 성격에 성공하지 못한다. 결국 왜군과 이순신은 최후의 결전을 맞이하게 되고, 죽음을 각오한 싸움이 시작 되었다. 

 결국 퇴각하는 왜군의 함선 500여척중에 200여척을 격파하고 왜적 500여명을 죽였으나, 온전하게 도망간 왜선은 50여척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사망하였다. 이순신은 숨을 거두면서, "지금 싸움이 한창이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마라."라는 말만 남겼으며, 장수들은 그 말을 받들어 아군도 알지 못하게 방패로 가려 전투를 마무리 하였다고 한다. 


사후...

이충무공 영정


 이순신이 이 노량해전에서 사망했다는 사실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이후 "이순신이 사망하지 않았다면, 선조와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쟁점을 가지고 말이 많다. 

 이순신은 임란의 전쟁영웅이라고만 하기에는 표현이 부족하다. 한국사 역사상 뛰어난 전투능력에 강직하고 청렴한 성격을 가진 사람은 이순신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23전 23승. 이것은 이순신 만이 해낼수 있는 기적이 아닌 준비된 승리이며, 역사상 두번은 있기 힘든 결과라고 생각한다. 

 사후 이순신은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받게 된다. 그 이후로도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수많은 비석이 각지에 세워졌으며, 현재까지도 이순신은 꾸준히 존경받고 사랑받고 있으며, 한민족의 역사상 최고의 군인이라 불리고 있다.

출처 : 성웅 이순신 (
http://www.e-sunshin.com/), 네이버 지식iN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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