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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학&문학 이야기

시조의 발생과 기원

김창식 2016. 2. 2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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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는 시조의 발생과 기원에 대해서 정리를 해보았습니다.

 국문학 전공수업 및 중고등학습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시조의 발생
 시조의 발생을 밝히는 일은 국문학계에서 예로부터 많은 논쟁이 있어 왔다. 통상 시조의 발생과 관련한 학설로는 고려말엽에 발생했다는 학설과 조선 초에 발생했다는 학설로 크게 대립된다. 이외에도 고려초기설, 고려중엽설, 15세기설, 16세기설 여러 가지 발생설이 있으나 그 근거는 미약하다. 시가발달의 전개양상을 살펴보는 것과 동시에 문집에 수록된 작품을 현전하는 여러 자료와 대비시켜 사실적 측면을 파악하여 보았을 때, 크게 두가지의 학설로 나뉘게 된다.

 

 (1) 고려 말엽 발생설
 고려 말엽 발생설은 시조가 고려 말엽에 즈음하여 발생했다는 학설이다. 이런 학설이 지지를 받게 된 요인으로는 바로 문학담당층의 변화이다. 고려시대 무신정권기에 접어들면서, 본래의 주 권력담당층이었던 문벌귀족이 몰락하게 되고, 지방 중소지주 출신으로 성리학을 공부하던 이들이, 고려 후기에 이르면서 점차 과거에 급제하여 정치권력을 장악하게 되고, 이윽고 조선을 건국하기에 이르는데, 이들을 신흥사대부라고 일컫는다. 신흥사대부는 문벌귀족과는 다르게 성리학을 중심으로 불교를 비판하였고 주관적 관념론을 객관적 관념론으로 대치하였기에,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과 경험을 서술하거나, 인간생활, 자연을 주제로 다루는 문학인 시조를 발달시켰다는 것이다. 문학담당층이 변화한 고려 중, 후반 시기를 기점으로 하여 문학의 갈래가 한번의 큰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그것이 아무래도 향가의 소멸과 시조의 창작과 연관되어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이 외에도 시조 이전에 있었던 장르인 향가나 속요 등을 통하여 시조가 기원했었던 배경을 추적하여 어느 정도의 일맥하는 위치인 고려 말엽을 추정하게 되는 것이다.


 (2) 조선 초 발생설
 조선 초 발생설이 나오게 된 계기는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후대에 진술된 문집의 사실성의 범주를 어디까지 두어야 하는 것인가와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어 성충은 백제 말의 충신으로 서 끝까지 백제의 안위를 생각하다 죽은 비운의 인물이니, 이를 기려서 후대에 시조를 짓고 그의 이름을 붙여 그를 기리려 한 것이 아니냐, 즉 후대인의 의작이라는 것이다. 이와 동일하게 고려 후대에 지어진 작품인 이방원의 하여가와 정몽주의 단심가 등도 사실은 그 작자가 명확하게 나타나 있는 문헌이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이를 바탕으로 이런 작품들도 그들의 생애를 기려서 후대의 사람들이 지은 擬作(의작)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이유가 나오게 된 근거로는 영조 대에 발간된 문집의 저자가 평민이라 이들의 서술적 태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어떤 역사에 대한 인식 부족이나, 조사할 수 있는 문헌의 한계 등으로 인하여 미약한 수준의 검증을 하였으므로, 시조를 창작한 자신이 쓴 문집을 토대로 실제 검증을 하여 시조의 발생연대를 이끌어 낸 학설이 조선 초 발생설이다.


 (3) 管見(관견)
 사실 조선 초 발생설의 입장은 조선 중,후기 문집에 수록된 작자의 사실적 진술을 일부 부정하는데 있어서, 고려 말엽까지 그 선을 긋고 있는 것인데, 그러므로 이방원의 하여가나 정몽주의 단심가 등 역시 후대인이 지어낸 작품일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게 된다. 허나 현전하는 자료를 대상으로 실제 시조와 작가의 일치 여부 및 창작 연대를 완벽하게 알 수 있는 작품 중에 가장 빠른 것이, 이현보의 어부단가, 이황의 도산육곡, 김구의 단가 등이라고 알려져 있다.(16세기 전후의 작품) 그러나 만일 이보다 더욱 빠른 시기에 시조를 창작한 문집이 발견될 경우에는 언제든지 쉽게 부정될 수 있으며, 이런 완성된 형태의 시조를 문집에 담는 작업은 대체로 어떤 장르의 정형적인 틀이 완성되었을 즈음에 등장하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사실 이런 근거로 따져보면 또 다시 고려 말엽에 발생한 것인지, 조선초에 발생한 것인지는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둘 중에 더욱 설득력 있는 학설을 살펴보자면 고려말엽 발생설이라고 생각된다. 시조와 성리학의 관계를 중심으로 생각해본다면, 문학담당층이 변화하게 된 고려 중후반부터 시조의 형태와 관련된 어떤 것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을 것이라고 짐작이 된다. 또한 조선초 발생설이 근거로 제시하는 것들은 새로운 문집의 발생으로 얼마든지 그 시대가 변화할 수 있으며, 시조의 발생과 문집의 발견 사이에 연관성은 찾을 수 있겠으나, 그것만으로 확실한 시기를 단정할 수 없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또한 문집에서 발견되는 삼국시대 시조는 조선시대 시조의 발견과 그 시간적 차이가 매우 크기 때문에 문제가 있지만, 고려 말엽의 작가가 수록된 시조를 곧바로 후대인의 의작이라고 하기에는 시가문학의 시간적 흐름의 궤를 같이 하기 때문에,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후기 사설시조의 등장에 시조장르 문학성의 약화를 언급하는 큰 요인으로 성리학에 대한 인식의 부족이 연관되어 있음으로 하여, 시조에 성리학이라는 학문이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리학의 등장으로 자연에 대한 물아일체의 정신 등이 등장하면서 이런 사고를 표현할 수 있는 문학적인 연행방식을 시조로서 나타내게 된 것이라고 여겨진다.

 

 

 2. 가사의 기원
 가사 역시 그 발생을 밝히는 데서 많은 학설이 대립하고 있다. 가사의 발생에 대한 학설로는 나옹화상의 서왕가를 중심으로 한 고려말 발생설, 정극인의 상춘곡을 중심으로 한 조선초 발생설이 대립하고 있다.


 (1) 고려 말엽 발생설
나옹화상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서왕가를 중심으로 하여 가사가 고려 말엽에 발생한 것으로 보는 학설이다. 사실 고려 말엽 발생설에는 나옹화상의 서왕가 이외에는 별다른 작품이 없어서 크게 지지를 받지 못하는 데, 이 서왕가라는 작품이 정말 나옹화상이라는 자가 썼는지에 대하여도 많은 의문점이 있다. 더구나 이 서왕가라는 가사작품은 나옹화상 사후 350년 뒤에 기록된 것으로 그 표기방식마저 임란 이후의 것으로 되어 있다. 주로 가사는 주로 성리학자들에 의해서 쓰이는 것인데, 그 작자가 불교 승려라는 것도 상당히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들에서 서왕가라는 작품이 정말 고려말에 썼는지에 대하여 많은 의문이 있다. 그러나 이후에 발견된 승원가라는 작품을 통하여 이에 대한 인식이 조금 바뀌게 된 부분이 있다. 승원가는 이두로 표기된 나옹화상이 쓴 불교가사이다. 그래서 고려 말엽 발생설에서는  승원가를 비추어 보았을 때, 나옹화상이 서왕가라는 작품도 충분히 쓸 수 있다는 것을 짐작하고, 수백년 뒤에 이두를 한글로 썼으니 표기방식이 다를 수 있다는 점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정극인의 상춘곡을 효시로 인정하지 않는 차원에서 고려 말엽의 서왕가를 그 효시로 인정하는 견해도 있다.(후술)


 (2) 조선 초 발생설
 정극인의 상춘곡을 중심으로 하여 가사가 조선 초에 발생한 것으로 보는 학설이다. 이는 조선전기에 지은 가사로 추정되며, 정극인의 후손이 그의 작품을 모아 제작한 문집인 불우헌집에 그 내용이 전한다. 그런데 이 불우헌집이 정조 대에 간행된 책이기 때문에, 그 가사의 신빙성이 의심된다는 것이다. 후대에 작성된 가사의 표기방식이 임란 이후의 방식을 사용했다는 것도 일부 의심스럽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후손이 만든 불우헌집에 수록된 상춘곡이라는 가사가 정극인이 작자가 아니라고 단정지을 만한 근거는 전혀 없으며, 오히려 정극인이 맞다는 쪽으로 무게가 실리고 있기도 하다. 성리학의 등장과 말미암아 강호가도의 자연을 노래했다는 측면에서 이런 가사가 작성되었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조선 초 발생설이 시대정신에 장르 발생의 부합성이 더욱 일치하지 않느냐고 본다면 조선 초 발생설에 무게가 실린다.


 (3) 管見(관견)
 정극인의 상춘곡을 그가 쓴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견해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를 완전히 부인할 수 없는 것이 그의 후손이 엮은 문집에 허구적인 서술을 했을 가능성이 낮아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한글 창제 이후에 이를 한글로 옮겨 쓰면서 다소 다른 표현을 통해 각색을 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정극인의 상춘곡은 가사의 효시라고 보기에 정말 잘 정제되어 있는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정극인이 상춘곡을 안 지었다면, 효시 작품이 아닌 게 되는 것이고, 지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잘 정제된 작품이 있다면, 분명히 이 전대에 정제되지 않은 어떠한 중간단계의 작품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와중에 등장한 것이 나옹화상의 서왕가이다. 서왕가도 숙종 이후에 판각되어 남아있는게 최초라고 하지만, 나옹화상이 정말로 쓴 것이라고 여겨지는 승원가의 등장으로 인하여 서왕가도 나옹화상이 쓴 것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이 많아졌다. 가사도 성리학과의 연관성을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장르의 측면에서 가사가 교술장르의 일종으로서 불교 이념을 펴는 교술적인 불교가사로 볼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서왕가는 가사의 기원적인 성격으로 문학사적 의의를 가질 수 있다고 여겨진다.

 

 

 [참고문헌]
고전시가론 수업내용 참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www.encykorea.com/encykorea.htm
권두환, 「시조의 발생과 기원」,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관악어문연구 18권0호 (1993), pp.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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