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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학&문학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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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식 2011. 1. 25.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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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리라고 생각했어, 지금까지."

 모색하듯이 첫 마디를 던졌다. 홋카이도의 차가운 공기를 누비려다 떨린 음성이 하루의 귀에 닿았을 것이다.

 "너를 행복하게 하는거, 다시 한 번 시작하는 거.... 한 번 실패한 우리라서 겁쟁이가 되어 있었어. 또 실패할지도 몰라. 아니, 우리니까 분명 실패투성이에다 너를 또다시 상처 입히고 말거야."

 소심하게도 말끝이 잦아들고 말았다. 나의 솔직한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용기를 북돋기 위해 하늘을 올려다보고, 다시 한 번 하루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것만은 약속할 수 있을 것 같아. 나, 너에게 두 번 다시 등 돌리지 않아. 네가 울 때 옆에 있어줄게. 네가 원한다면 손을 뻗어서 머리를 쓰다듬어 줄게. 손을 잡아주길 바란다면 두 손으로 감싸줄게. 혼자서 슬퍼하게 하지 않을 거야. 그 대신 네가 즐거울 때는 기쁨을 나눠 줘. 행복을 독차지하게 놔두지 않을 거야. 나는 너랑 같이 웃고 싶고 같이 울고 싶고 화내고 싶고 같이 잠들고 싶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사랑해, 하루. 사랑하니까 어쩔 수 없잖아. 이젠 헤어지고 싶지 않아. 너를 행복하게 해줄 때까지 평생이 걸릴지도 모르지만, 나 노력해 보고 싶어."

 하루는 거리를 좁혀주지 않았다. 충혈된 눈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그래서 내 쪽에서 좁혀주었다. 3미터 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하루가 한 발, 두 발 뒤로 물러나는 바람에 다시 거리가 벌어지고 말았다.

 "노력해 보고 싶어, 하루!"

 그녀는 감정의 마지막 방어선을 지키려는 듯 입술을 꽉 다문 채 뒷걸음질쳤다.

 "부탁이야, 대답해 줘. 달아나지마, 하루!"

 그녀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하얀 오열이 터져나왔다. 눈에도 굵은 눈물방울이 맺혔지만, 발끝만은 뒤로 도망치고 있었다.

 "포기하지 마. 넌 싸우는 여자잖아!"

 어젯밤 가르쳐준 영화 대사였다. 하루의 다리가 멈췄다. 다시 도망가게 놔둘 줄 알아? 나는 그 순간 달려가 그녀의 몸을 양팔로 붙잡았다. 정말이지, 몇 년 만의 포옹이었던가.
 이 여자가 이렇게 딱딱한 몸이었던가. 코트 위로도 어깨뼈가 느껴졌다. 왠지 처음 하루를 안았을 때의 기억이 머리를 스쳤다. 많은 남자를 거치겨 연륜이 다져진 여자도 있지만, 하루는 오직 한 남자밖에 모르는 채 스물여섯 살의 육체를 만들어왔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들 주위를 살을 에는 듯한 차가운 바람이 소리를 내며 춤추고 있었다.

 "나, 노력할 수 있을까?"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하루는 힘겹게 신음하고 있었다.

 "안 될 것 같으면 내가 심장을 마사지해 줄게. 내가 키스해서 숨을 불어넣어 줄게. 네가 다시 살아날 때까지, 몇 번이든, 몇 번이든."

 나는 낯간지러운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어깨에서 하루를 떼고 코가 닿을 거리에서 조심조심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울어서 부은 하루의 얼굴에는, 나와 함께 이 운명에 따르려는 굳은 각오가 어려있었다.
 그것이 도쿄에서부터 장장 730킬로미터를 달린 끝에 나온 답이었다.

 가랑눈이 춤추고 있었다. 홋카이도를 얼리는 가혹한 한파가 곧바로 남하해서 우리들의 거리에 내려온다. 그것은 눈을 뿌리고 길 위에 얼음 덫을 깔아, 한데 엉켜 미끄러지는 우리를 비웃을지도 모른다. 하루가 다치지 않도록 재빨리 내가 밑에 깔려도, 누구 한 사람 칭찬해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에게 작은 상처 하나 나지 않게 한 걸, 난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살아 나가자, 하루.
 살다가, 살다가, 어느 한쪽이 먼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별의 말은 소중히 담아 두기로 하자.



-연애시대[소담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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