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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ISSUE] “어머닌 김밥 장사 창피하다지만 … 난, 남 부러운 게 없죠”

김창식 2011. 10. 20.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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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광장시장 ‘마약김밥’ 40년, 이상훈씨 가족


지난 9월 15일 저녁 파리와 도쿄에서 활동하는 패션 디자이너 김지해씨가 오랜만에 귀국해 파티를 열였다. 건축가 마영범씨가 개조한 서울 가회동 한옥에 영화감독 이준동씨, 배우 오광록씨, 화가 금동원씨, 무용가 김형남씨 등 문화계 인사 100여 명이 모였다. 문화와 예술을 화두로 삼는 자리에서 유독 인기를 끌었던 음식이 하나 있었다. 이름하여 ‘마약김밥’. 서울 종로5가 광장시장에서 파는 손가락만 한 크기의 ‘꼬마김밥’인데, ‘마약김밥’으로 불린다고 했다. 쌉싸름한 겨자 소스와 얇게 저민 단무지를 곁들여 먹었다. 1인분에 여덟 개, 2500원짜리 김밥이 그날 밤 화제의 중심이 됐다. “별 거 안 들었는데 왜 이렇게 맛있나”“마약처럼 손을 뗄 수가 없네”… f가 마약김밥의 원조를 찾아간 이유였다.

처음 마약김밥을 찾아간 날은 개천절 오후였다. 원조 마약김밥 집은 광장시장 원단 골목에 있었다. 종로4가에서 을지로4가를 잇는 일방통행길 중간쯤 위치한 ‘의류도매상가’ 입구로 들어가 제일 안쪽 자리를 찾으면 된다. 비슷한 김밥가게가 대여섯 집 붙어 있는데 일제히 주황색 ‘원조 마약김밥’ 간판을 걸어놨다. 그러나 마약김밥의 진짜 원조는 40년 동안 같은 자리를 지켜온 이상훈(78) 할머니의 ‘모녀김밥’이다. 지난 2월 광장시장 먹자골목에 낸 마약김밥 2호점이 유일한 ‘분점’이다. 공휴일인데도 김밥집을 찾는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김밥을 썰고 포장하는 유양숙(51)씨와 유지풍(43)씨 남매의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민첩하게 움직인다. 이들은 이상훈 할머니의 자녀 1남3녀 중 첫째와 넷째다.

1호점은 시장에서 ‘세 칸’짜리로 통하는 노천가게다. 좀 찌그러진 양은 대야 두 개에 김밥과 유부초밥이 각각 담겨 있고, 바로 옆에는 뽀얀 김이 솟는 어묵 냄비가 하나 있다. 넓은 탁자 가장자리에 둘러앉아 먹을 수 있지만 메뉴는 딱 세 가지, 김밥·유부초밥·어묵뿐이다. 갖가지 음식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먹자골목의 풍경과는 대조적이다. 전등선 사이에 매달려 있는 주황색 당근 모양의 전화기도 바빴다. 음식이 어느 정도 팔리고 있는지, 언제 배달되는지 집에서 김밥 제조를 총괄하는 셋째 지애(46)씨와 2호점을 맡은 둘째 명순(48)씨의 전화였다.

대야 한 가득 담겨 있던 김밥이 동나자 가게 주변에 기다리는 손님들이 순식간에 구름처럼 불어났다. 이따금 “김밥 간을 동생이 한 건지, 언니가 한 건지”를 따지는 단골손님도 와서 사간다. 20, 30년째 오는 손님들이란다. 지도를 들고 선 일본 관광객도 손님 줄에 끼어 있었다. 오사카에서 관광을 온 미토 사치에는 “마약김밥은 일본 매체를 통해 잘 알려진 서울의 맛집”이라며 "꼭 먹어보고 싶었다”고 했다. 20분쯤 기다리자 검은 보자기에 쌓인 김밥이 도착했다. 대야 위로 수북이 김밥이 담겨 있다. 눈 깜짝할 사이 김밥 대야가 비워졌다. 바쁠 때는 1시간에 대야 하나 분량이 다 팔린다. 대야 하나에 들어가는 김밥 개수는 어림잡아 500∼600개다. 1호점은 일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6시부터 다음 날 새벽 2시까지 ‘쉴 새 없이’ 김밥을 판다. 가끔 만들어놓은 김밥이 다 떨어져 일찍 문을 닫는 날도 있다. 양숙씨가 개인적 대화를 할 수 있는 시간은 주변 포목상들이 귀가하는 저녁 7시에서 9시 사이뿐이라고 했다. 2호점은 연중무휴 다.

 광장시장의 평일 저녁, 분주했던 시장 곳곳에서 ‘쿠당탕’ 셔터를 내리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어둠이 깔린다. 시장한 손님들이 먹자골목에 모여들어 왁자지껄해질 때면 마약김밥 1호점 부근은 황량할 정도로 조용해진다. 그래도 유씨 남매는 쉴 틈이 없다. 퇴근길에 김밥을 사가는 손님들이 삼삼오오 찾아오기 때문이다.

 막간의 틈을 타 양숙씨에게 마약김밥이 어떻게 시작됐는지 물었다.

 “어머니가 경기도 고천에서부터 김밥을 팔러 동대문에 나오신 게 처음이었죠. 제가 어릴 땐 운수업을 하시던 아버지의 수입이 좋아 꽤 잘 살았었어요. 5학년 때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어머니가 생활전선에 나서게 됐죠. 2년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동대문 상인들한테 김밥을 판 돈으로 지금 이 자리를 사셨어요. 그때 돈으로 가운데 한 칸을 700만원에 사셨대요. 이런 행상 자리는 주소가 따로 없지만 옛날부터 이 골목 행상 자리 42칸에 전부 주인이 따로 있어요. 한 칸씩 늘려 지금은 세 칸이 된 거죠. 어머니가 현명하다고 생각했던 건, 잘 팔리는 음식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만들면 따라하기 마련인데, 어머니는 꼭 김밥을 집에서 만들어 나가셨다는 거예요.”

 ‘마약김밥’이라는 상호는 비교적 최근에 붙여진 이름이다. 2000년대 중반 한 블로거가 마약김밥이라고 소개해 히트를 쳤다. 그러나 ‘마약’이라는 이름으로 상표등록이 되지 않아 어떻게 하면 ‘원조’를 지킬 수 있나 고민 중이다. 예전처럼 장사가 되지 않는 시장에서 마약김밥 덕에 주변 장사들까지 먹고살 정도로 김밥의 위력은 대단하다. 저마다 “내가 원조”라고 우기고 심지어 인터뷰까지 대신해 혼돈을 일으키는 장사치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대뜸 “포기했어”라면서 머리를 저었다.

원조 마약김밥은 홀어머니 이상훈씨와 맏딸 양숙씨의 정처럼 단단하게 말려 있다.

 “처음엔 이름도 없는 행상이었죠. 매일 아침 일어나면 ‘(김밥의) 간 좀 봐라’고 하는 어머니를 도울 수밖에 없었어요. 그 무거운 대야를 머리에 이고 버스를 타고 멀리 나가셨죠. 그때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1남3녀를 홀로 뒷바라지하신 어머니 때문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거예요. 동생들은 전부 대학까지 마쳤어요. 저야 일을 돕느라 못 갔지만…. 스무 살이 되던 해 본격적으로 시장에 나왔어요. 주변 상인들이 ‘모녀김밥’이라고 불러서 가게 이름이 됐죠. 김밥은 손이 많이 가고 칼질해야 하는 음식이라 손도 많이 베었죠….”

 말끝을 흐리는 양숙씨에게 김밥의 공정에 대해 물었다. 마약김밥은 종로구 숭인동에 있는 이상훈 할머니 집에서 만든다. 매일 오전 6시부터 오후 7시까지 셋째 지애씨와 아주머니 여섯 명이 만들어 대야에 담고 검정 보자기로 싼다. 하루에 열댓 번 둘째 명순씨의 남편이 오토바이로 배달하는데, 대목인 토요일은 배달 직원 한 명을 고용한다.

 “김밥을 팔아 번 돈으로 숭인동으로 이사 왔어요. 처음엔 세를 얻어 살다가 집을 샀죠. 저는 결혼해 그 부근 아파트에 살아요. 제 남편은 회사원인데 김밥 장사에는 관여하지 않고 있어요. 1992년 3층으로 된 어머니 집의 3분의 1을 김밥 만드는 부엌으로 개조했어요. 1층은 부엌이고, 2층에는 셋째가 살고, 3층엔 어머니가 살아요.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그때그때 만들어 팔다 하루가 다 가는, 시간과의 싸움이에요. 사람들은 김밥을 쉽게 만드는 음식이라고 생각해 돈을 주고 배우려 들지 않아요. 우리 김밥은 한눈에 식별이 가능할 정도로 단단하게 말려 있어요. 만드는 데 오래 걸리지만 그래서 식감이 좋죠. 세월이 지나면서 입맛도 변했지요. 예전엔 경기미로 끓인 밥을 다시 쪄서 질게 만들었는데, 요즘은 꼬들꼬들한 밥을 선호하기 때문에 여주 쌀을 전기솥에 지어 바로 식혀서 만들어요. 어머니 음식은 모양은 없지만 맛은 좋아요. 음식이란 재료가 무엇이든 ‘간’이 중요한데 간을 잘 맞추세요. 밥은 소금과 참기름만으로 간을 하고, 일일이 볶은 당근과 부추와 단무지밖에 안 넣어요. 겨울철 노지 시금치가 맛이 좋을 때는 시금치를 쓰지만 잘 쉬기 때문에 주로 부추를 써요. 신선도를 최우선으로 생각해 모든 재료를 그날그날 받아서 써요. 참기름도 매일 새로 짠 것이고요. 방부제를 전혀 쓰지 않기 때문에 여름철에는 포장을 권하지 않아요. 여름철에 못 판 것을 가을·겨울에 다 파는 셈이죠. 마약김밥의 레시피는 우리 직계 가족만이 아는 비밀이에요. 아직도 매일 오전 6시 첫 ‘다라이’는 올 여든이신 어머니가 만들어요.”

하루에 김밥을 몇 개나 파는지 궁금했다.

“많이 팔리는 날과 덜 팔리는 날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식구들도 몰라요. 그때그때 집과 1호점, 2호점에 번갈아 전화하면서 김밥을 만들어 파는 거니까….”

매출 이야기가 나오자 양숙씨는 말을 아꼈다. 화제를 마약김밥과 찰떡궁합인 ‘톡 쏘는 겨자 소스와 단무지’로 바꿨다.

“예전엔 유부초밥 간을 약간 새콤하게 했는데, 음식이 상했다는 오해를 받아 식초를 뺐어요. 그랬더니 맛이 너무 밋밋해 겨자 소스를 별도로 내놓았죠. 어느 날 제가 김밥을 그 소스에 찍어 먹어 본 후 그렇게 팔자고 했는데 반응이 좋았어요. 노란 무도 일일이 썰어 별도로 양념해요. 살짝 얼린 상태가 맛이 최고인데 잘 녹아서 얼린 무 맛을 보긴 어려워졌어요. 김밥을 먹을 때 국물이 필요해 어묵도 같이 판 거고요.”

철 들자마자 김밥 장사를 도와야 했던 양숙씨. 애환도 많았을 터였다.

“음식 장사에 대한 편견이 가장 견디기 어려웠어요. 광장시장에서 포목상과 음식 장사의 신분 차이는 하늘과 땅 같았죠. 어머니를 대신해 외상값을 받으러 갔다가 무시를 당하고 돌아온 적이 많았어요. 많이 울었죠. ‘다른 건 몰라도 김밥 장사는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수십 번 결심했었어요.”

지금은 어떤지 묻자 웃음을 떠뜨렸다.

“지금요? 사업도 안정적이고 소문이 나서 다들 부러워하죠. 막내 동생도 예전엔 창피하다면서 학교 친구들을 피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돈 버는 재미로 살아요. ‘겉모습만 따지는 사회에서 내 주머니만 든든하면 된다’ 그거죠. 성실로 다져진 우리 가족사업, 다른 길은 생각할 수 없어요. 이젠 부러울 게 없어요. 1년에 한 번 어머니 생신인 5월에 호텔 뷔페에 가는 것을 빼면 매일 김밥 장사를 해요. 지금 군대 간 아들이 방학에 ‘아르바이트’를 나왔을 땐 ‘얄짤없이’ 시간당 5000원을 줬죠. 다른 사업을 하려면 직접 벌어서 하라고 하는데, 어림도 없다고 봐요.”

양숙씨에게 원조인 어머니와의 인터뷰를 여러 번 부탁했지만 매번 거절당했다. “김밥 장사하는 게 창피하다. 그게 뭐 자랑이냐”며 어머니가 매우 노여워하셨다고 했다. 50줄에 들어섰지만 아직도 월급을 받는 딸인지라 어머니가 어렵다고 했다. 나흘을 가게에서 장사진을 치고 졸라대도 완강히 거절당했다.

만에 하나 어머니가 시작한 그 자리를 내놓는다면 얼마에 팔 것인가 물었다.

“적어도 ‘억대’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돈 되는 것은 김밥 장사밖에 없다’는 생각은 어머니나 저나 변함없어요.”

글=이네스 조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유양숙씨가 공개하는 마약김밥 성공 비법

- 절대 비밀 레시피 : 직계 가족에게만 전수
- 최상의 국산 재료 사용 : 여주 쌀에 매일 새로 짠 참기름 사용
- 식자재의 철저한 신선도 관리 : 잘 쉬는 시금치 대신 부추 사용
- 가족 간의 완벽한 팀워크 : 1남3녀 모두 김밥 인생
- 규칙 엄수 : 매일 오전 6시 ‘첫 김밥은 어머니가 만든다’는 가도(家道)
- 김밥 단품에 ‘올인’ : 잘 되면 바꾸지 마라

출처 : 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aid/2011/10/20/6105000.html?cloc=n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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