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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고종과 상하이로 보낸 홍삼 1만근

김창식 2008. 11. 16.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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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과 홍삼 1만근...상하이로 빼돌린 홍삼 1만근은 과연 어디로 갔을까
 


고종(高宗), 흔히 나라를 빼앗긴 비운의 군주, 또는 마누라와 아버지의 기세에 눌려 제대로 왕권조차 행사하지 못한 무능한 왕. 대략 이런 내용들이 고종에 대한 오늘날의 인식일게다. 특히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는 과정에서 그는 철저하게 `논외의 인물'로 치부되곤 해왔다. 

 얼마전 한승조 전 고려대 명예교수가 `일제식민지 찬양론'을 늘어놓은 밑바탕에는 고종이후 쇠락해가는 조선으로서는 도저히 근대화를 이룰 수 없는 한계가 있었고, 결국 일본이 우리를 근대화시켰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이 신주단지처럼 자리잡고 있다.

 과연 고종은 무능한 군주인가. 자체적으로 조선을 근대화시킬 계략이 없었을까. 이런 근본적인 물음에 기자는 답할 능력이 없다. 아마도 예전에 같이 공부했던 학자들이 이 문제를 반드시 규명하리라. 최근 학계 일부에서 `자생적인 근대화 가능성'에 주목하면서 고종의 존재를 다시 조명하는 작업이 진행중이라니 지켜볼 가치가 있을 것같다. 

  여기서는 홍삼 1만근의 얽힌 얘기를 통해 고종을 다시 생각해보고자 한다.
 기자가 홍삼 1만근에 대해 들은 것은 2004년 영사관에 근무하는 김선흥 부총영사를 통해서였다. 평소부터 역사에 관심을 보여온 그는 `역사를 전공'했다는 기자를 만나자 대뜸 홍삼 얘기를 꺼냈다. "고종의 왜 홍삼 1만근을 빼돌려 상하이로 보냈을까요. 그리고 임시정부 사람들은 왜 이 돈을 찾지 못하고, 그렇게 궁핍하게 살았을까요." 김부총영사는 두 가지 질문을 동시에 해왔다. 글쎄, 그런 일이 있었나... 잠시 어리둥절하기도 했고, 고종이라니, 그 무능한 고종이 이런 이를 꾸밀 줄이나 알았을까, 하는 빈정댐이 머리를 스쳐갔다.
 그러던 차에 고종과 홍삼 1만근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기술한 서적을 발견했다. 김준엽 선생께서 장인인 `석린 민필호 전'을 쓰는 가운데 이 내용을 전하고 있다.
 내용은 이렇다.
 
 때는 1922년 여름 임정은 당시 정말 비참한 나날을 보냈다. 3.1운동의 기세를 모아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에서 출범시킨 임정은 이내 재정난에 빠지고 만다. 결국 반년의 집세를 지불하지 못하자 집주인이 법정에 고소해 이사를 재촉했다. 민필호가 임정대표로 법정에 출두해 담보를 잡히고 이 문제를 해결할 정도였다.
 그러던 차에 당시 조선일보 편집국장인 김병혁씨와 민씨 일문인 민병길씨가 임정 사정을 전해듣고는 임정을 도울 생각으로 고 민영익(閔泳翊)의 장남 민정식(閔貞植)이 갖고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홍삼 1만근(또는 이를 판 자금)을 임정에 전달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민영익은 누구이고, 민정식은 누구인가. 민영익은 바로 명성황후의 친조카다. 고종은 일본에 대항하려면 자금이 필요할 것으로 보고, 민영익에게 은밀히 홍삼 1만근을 주고 이를 팔아 자금을 만들라는 밀지를 내린다. 아마 밀사파견이나 외국을 상대로 한 일본의 조선점령 반대로비에 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민영익은 이 홍삼을 팔아 막대한 자금을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어느 은행에 그 자금을 예치해뒀다. 당초 이 돈은 고종의 자금이었으나 이후 한일합방이 되면서 민영익의 돈으로 어쩔 수 없이 탈바꿈하게 된 것.
 그러나 민영익도 세상을 떠날 때 아무 유언도 없이 떠나 버렸다. 다만 열쇠 하나만 중국인 첩에게 남겼다. 민영익은 중국에 와서 소실인 중국 소주여인(蘇州女人)과 살았다. 그 사이에 난 아들이 민정식이다. 정식은 부인에게 열쇠를 받았으나 어느 금고 또는 어느 은행에 맞는 것인지 몰랐다.

 당시 상하이는 발칵 뒤집혔다. 홍삼 1만근이라면 당시 재정난을 단숨에 해결하는 것은 물론이고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거사'를 도모할 수 있는 돈이었다. 그래서 임정 사람들은 마치 탐정영화를 방불케하는 작전에 착수한다. 임정은 청년들을 동원해 주야로 민정식의 신변보호에 힘썼고, 몇몇 사람들을 동원해 비밀리에 이 열쇠를 조사했다. 그 결과 이 열쇠는 상하이 영상회풍은행(英商匯豊銀行)에 맡긴 민영익의 상자를 여는 것이었다. 영상회풍은행은 요즘말로 하면 홍콩상하이은행, 바로 HSBC 은행을 말한다.
 임정요인들과 민정식은 곧바로 은행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열쇠를 은행에 내밀자, 진짜로 한 보관함이 나왔다.

 임정 요인들과 민정식은 HSBC 은행 상하이 지점에 가서 그 보관함을 열었다. 설레이는 흥분과 기대 속에서 보관함이 열렸다. 그러나... 엄청난 돈은 물론 값비싼 골동품(민영익은 서화를 좋아하고 난초를 잘 쳐 그의 그림은 당시에도 꽤 값이 나갔다)은 커녕 이상한 종이 몇장만 덜렁 있었다. 너무나 큰 실망에 "이게 뭐야, 사기치는 거야"라는 소리가 웅성거렸다. 이제 마지막 남은 것은 그 종이 몇장을 보는 일.
 그 종이들은 법적인 소송과 관련된 문서였다. 임정요인들은 이 문서를 들고 상하이 지점장에 가서 따지듯이 물었다. 지점장의 말이 "우리는 잘 모릅니다. 혹시 홍콩 본점에 가면 뭔가 나올지도 모릅니다"라고 말하곤 돌아가버렸다.

 급히 HSBC 홍콩본점에 전보를 쳤다. 그러자 본점에서 연락이 왔다. 본점 보관함에도 민영익의 물건이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 그 돈만 있으면 상하이를 거점으로 대한 독립의 열망을 키워나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고종황제의 은덕이 아닌가. 우리가 왕정을 버리고 민주주의 공화국의 기치를 올렸지만 임정도 결국 왕의 은혜를 입는게 아닌가. 임정요인들은 마음이 급했다. 중국의 유명인사(康紹儀)씨를 예방해 홍콩 HSBC 은행 본점에 있는 그의 친구에 보내는 소개서를 받았다. 임정요인 몇명을 홍콩으로 보냈다. 본점에 가보니 1년이나 납부하지 않은 보관함 임대료 1천여원(당시로서는 꽤 큰 돈)을 내라고 해서 이마저 지불했다.  드디어 민영익의 보관함을 열었다. 그러나... 역시 텅빈 상자였다. 아니 이번에도 무슨 소송관계 문서 두어장이 있을 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하다못해 홍삼 1만근으로 마련한 자금 중 일부라도 있던 지 아니면 그돈으로 산 보물이라도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일부 인사가 의문을 제기했다. "민영익의 인품으로 볼때 그가 사기칠 일은 아니고, 혹시 은행의 흑막이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은행을 상대로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 임정 요인들은 나라잃은 사람들이었다. 일본인 신분으로 이 은행에 소송이라도 걸 수 있을까. 일본을 깨부술 자금을 마련한다는 명목으로 말이다.
 거의 1년간 진행된 `홍삼 1만근'에 대한 `연극'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임정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연극의 주인공이랄 수 있는 민정식이 갑자기 죽었다. 그의 처남인 이규정이 상하이로 와서는 일본 형사를 동원해 야반에 민정식의 집에 잡입해 그의 부부를 죽이고 말았다. 또 애초에 이일을 임정요인에게 전달한 조선일보 김병혁은 베이징을 거쳐 귀국길에 올랐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돼 신의주 감옥에서 옥사한다. 또 한사람 이일에 관련된 민병길은 임정을 따라 쓰촨성 충칭까지 갔다고 충징에서 죽고 말았다.

 고종의 홍삼 1만근에 대해 제대로 내막을 아는 사람들이 대부분 죽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중국인 관계자가 나타났다. 그는 "HSBC 은행은 출범 당시 자본이 수백만원에 불과했는데 갑자기 상하이에서 가장 큰 은행으로 성장한 것이 이상하다"면서 " 그 시점이 민영익이 홍삼 1만근을 팔고, 이를 은행에 맡긴 시점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특히 당시의 상하이 상황은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민영익 뿐 아니라 당시 만주 청나라 황실이나 황족의 일부는 `혁명군(국민당이든 공산당이든)'이 성공하면 자기들 재산이 다 몰수될까 두려워 막대한 금은보화를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외국인 경영의 HSBC 은행 보관창고에 넣어두었다고 한다. 보관함 주인 가운데 일부는 이후 혁명군이 정권을 잡은 뒤 피살된 자가 많았고, 멀리 피신한 자도 적지 않았다. 상하이로 돌아와 돈을 찾을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

 결국 주인없는 엄청난 돈이 HSBC 은행 금고에 고스란히 남은 것이다. HSBC 은행은 암암리에 이 많은 돈을 자신들의 수중으로 돌린 것. 그래서 당시 가장 큰 은행으로 성장했다는 것이 중국인이 전달해준 얘기이다. 그러면 고종의 홍삼 1만근을 팔아 만든 엄청난 `종자돈'도 결국 HSBC 은행이 꿀꺽했단 말인가. 아, 고종은 어찌 후사를 위한 거사자금 마련하는 것에도 이처럼 무능하단 말인가. 정년 무능하고 무능한 군주, 고종,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독자들은 혹여 HSBC 은행 광고를 TV에서 보거나 길거리에서 그 은행 간판을 보면 "이놈들아, 피같은 홍삼 1만근 내놔"하고 되뇌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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