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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이야기

할머니의 외출

김창식 2012. 1. 15.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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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고향 경상남도 거창군을 2박3일간 갔다오기로 하였다.
아무리 대한민국 방방곡곡 현대 문명의 손길이 닿는다고 하더라도 지역별로 차이는 있는 법이다.
어머니의 고향 거창도 집을 개량하고 도로를 새로 깔고 다양한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어느정도 깡촌의 티를 벗은 느낌이 물씬 풍겼다.

△할머니의 집


하지만 그것도 읍내에서나 볼법한 광경이다.
올해로 89세이신 외할머니께서는 그런 거창군에서도 남상면 청림마을이라고 하는 거의 노인분들만 사시는 동네에 홀로 사신다. 도시에서 오래 사신 노인분들이시라면 모르곘지만, 평생을 논과 밭을 함께하여 살아오신 분들은 대부분 당신들이 살던 곳에 계속 머물기를 원하신다.

어쨋든 그런 할머니의 집은 낡디낡았다. 나름 개량을 하였지만, 오래된 기와지붕 소를 키우던 외양간, 푸세식 화장실은 이제 더이상 손길이 닿지 않아 내가 예전에 보았을때 보다 더욱 낡았다. 문득 푸세식 화장실은 어렸을 때는 너무 가기가 싫어서 마당에 신문지를 깔아놓고 큰일을 보던 기억이 난다.

△어릴적 그렇게 싫어했던 푸세식 화장실


내가 나이가 25세이고,
내가 어렴풋이 기억하는 예전 할머니 댁의 모습 그리고 할머니의 모습이 오래되어봤자 한 20년이 더 되었겠냐마는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할머니께서도 그 세월이 지나서 이제 앞을 잘 보지 못하시고, 잘 걷지도, 잘 듣지도 못하신다.
그런 할머니께서는 오래도록 고수해 온 생활스타일을 고집하신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정해신 시간에 딱 식사를 하시고, 정해진 길이만큼 담배를 태우시고, 정해진 시간 만큼 텔레비전을 보시고,
정해진 시간에 주무신다.

가끔 우리들이 할머니댁을 찾아가서 그 일상을 약간 어지럽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런 할머니께서도 가끔은 밖에 나가시는 일이 있으니, 읍내에 사시는 이모와 함께 장을 보거나 음식을 먹으러 가시는 것이다. 그런데 옷을 사거나 음식을 먹을 때에도 할머니의 고집과 투정이 심해져서 이모께서도 가급적이면 할머니를 잘 모시고 나서지 않고 집에서만 돌보려 하신다.

그런 할머니께서 혼자서라도 꼭 읍내에 나가야 할 일이 있으니 바로 담배와 시계 때문이다. 할머니께서 사시는 동네에는 구멍가게 조차도 없기 떄문에 담배를 살수가 없어서 읍내를 나가야만 한다. 할머니께서 피우시는 담배는 2000원 짜리 한라산. 할머니댁에는 늘 담배재가 날린다.

내가 시골에 온지 이틀째 되던 날 밤. 잠을 자고 있던 나는 어머니와 할머니께서 무언가 다투고 있는 것을 듣고 잠이 깨고 말았다. 그것은 할머니 집에 있던 시계 때문. 할머니께서는 멈춰버린 시계의 건전지를 사야한다고 다음날 읍에 나가야 한다고 하셨다. 어머니께서는 할머니 혼자서 이 추운 겨울날 읍내를 나가시는게 안되보이셨는지 어머니께서 나갔다 오겠다고 하셨지만, 할머니께서는 한사코 당신이 직접 갔다 와야 한다고 하셨다.

시골에는 버스가 지독히 다니지 않아서 오전에는 6시와 9시에 한대씩 오고 오후에도 2~3대 오기 때문에 시간을 맞추어 나가지 않으면 낭패라고 한다. 여하튼 그런 할머니께서는 핸드백에 알람시계를 챙기시면서 차비인 천백원을 고이 싸서 그 옆에 가지런히 두셨다. 그리고는 손목시계를 계속 보시면서 나갈 시간을 재고있으신 것이었다.

자식이 혹은 손자가 갔다와도 될 길을 굳이 당신이 가셔야 한다고 그것도 혼자서 가야한다고 고집을 피우시는 할머니께서는 결국 어머니의 만류를 뒤로 하고 담배 한대에 불을 붙인 뒤 유유히 읍내로 향하셨다.

시골이 보통 도시와 다른 점이라면 정이라는 것이 있다는 점이다. 물론 도시라고 그런것이 아주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 기다려주고 깎아주고 얹어주고 뭐 이런 것이 시골에서 더욱 쉽게쉽게 느껴지니 말이다. 할머니가 굳이 시계를 들고 건전지를 사러가는 이유는 할머니께서 가시는 그 가게에서 꼭 약을 넣어준 뒤 시간을 딱 맞추어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마도 할머니께서는 시계에 약을 넣은 뒤 마을로 돌아오는 11시 버스를 이 추운 겨울날 담배를 태우시며 어디선가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리라.

△할머니와 어머니의 다정한 모습


결국 정오가 다되어서야 할머니께서는 당신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셨다. 할머니의 가방에는 시간도 꼭 맞추어져 있고 깨끗하게 닦여져 있는 알람시계와 한라산 담배 두갑이 들어있었다.

내년이면 90이 되는 노인이 남편도 여읜채 혼자서 살아가는 것이란 쉽지 않은 일일텐데도 할머니께서는 그럭저럭 잘 살아가신다. 좀 애처롭게 말하는 사람들은 더러 연명해 나간다고 하는데, 글쎄다. 아마도 쳇바퀴처럼 돌아가다 머지 않아 멈추게 될 것을 아는 삶이면서도 그 속에는 가끔씩 알게 모르게 생기는 삶의 소소한 즐거움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하루하루를 더 살아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것임을 나는 조금이나마 느낀다. 할머니의 외출도 그런 소소한 즐거움 중의 하나가 아닐까.

 

 

2016.01.

할머니께서 2015년에 돌아가셨다. 항년 92세였다. 할머니가 생각하는 당신의 삶은 어땠을까. 가끔 할머니 생각이 난다. 좋은 곳에서 행복하게 사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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